어렵고 머리아픈 글들 9

내릴 수 없는 기차 4: 맑스와 상품물신 (3)

4. 상품물신을 이해하는 데 추상이 그토록 중요한가?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그는 상품물신을, 아니 상품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는 의 출발점인 '상품'장이 자본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임을 자인한 바 있는데, 사실 이 어려움의 많은 부분은 바로 추상과 관련된다.*   은 “부르주아 사회의 … 경제적 세포형태”(MEW23, 12, 김수행 1-상 4)인 상품의 의미를 묻는 데서 시작한다. 상품이란 무엇인가? 상품은 교환을 위한, 즉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맑스는 이 뻔한 답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교환이 일반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너무나도 이상한 것, 즉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로 가득찬 기묘한 물건”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과 좋은 삶

1. 행복이라는 말은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상적이다. 한여름 심한 갈증을 겪을 때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잔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며,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가족과 평화로운 저녁시간을 함께 보낼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뤄냈을 때, 예컨대 열심히 준비해서 원하는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게 됐을 때도 우리는 행복감을 맛본다. 이러한 경우들을 일반화해보면, 행복이란 내 안의 어떤 심리상태, 그것도 나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감정이나 느낌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그것은 내가 뭔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혹은 그 추구의 결과로 뭔가를 성취했을 때 내면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나 만족감과 관련되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과 연관되는 이러한 긍정적 감정, 즉 감각적..

내릴 수 없는 기차 3: 맑스와 상품물신 (2)

3. 교환의 양적 비율이 갖는 규범적 힘이 실제 교환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애초에 교환에 참여할 때 행위자의 관심은 상품의 사용가치에 있다. 사용가치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애초에 그는 교환에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환과정에서 이 관심은 사라진다. 상품은 교환가치로 환원되어 행위자들의 관심은 교환가치로 이동한다(하인리히, , 73 참조). 즉 그들은 이제 “자신의 생산물로 자신들이 타인의 생산물을 얼마만큼 얻을 수 있는가, 그래서 생산물들이 어떤 비율로 교환되는가”(MEW23, 89, 김수행 역, 1-상, 94, 번역 일부 수정)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우리 사고가 개념을 형성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후자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

내릴 수 없는 기차 2: 맑스와 상품물신 (1)

2.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는다는 걸 알아도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차에서ㅡ인용자] 내릴 수 없게 만드는 위력”이 자본주의에 내장되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또 이를 해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이가 을 쓴 맑스였다.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인간형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이는 베버만이 아니라 맑스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베버와 달리 맑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베버와 달리 그는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데 근면이나 성실과 같은 어떤 개신교적 가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그 어떤 긍정적 가치도 동원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재생산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통해 의식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

내릴 수 없는 기차 1

1. 백낙청은 탈성장론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맥락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자본주의 나쁜 건 알지만 자본주의 무서운 건 덜 실감하는” 편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백낙청, , 351면). 그의 이러한 발언은,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체제전환’이 요구되며 체제전환을 위해서는 ‘경제적 성장주의’ 담론의 극복이 긴요한 과제임을 주장하는 탈성장주의적 운동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체제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이 탈성장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얼마만큼의 성장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지를 연마”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를 도외시한 당위론”, 즉 현실과 분리된 “탁상공론”에 그칠 것이며, 이렇게 되면 “대중은 탈성장론을 일부 ‘잘난 사람들의 거룩한 말씀’ 정도로 들을..

지젝의 글쓰기: 글쓰기의 어려움(2)

2. 분과학문을 넘어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철학계의 스타 중 하나인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철학자로서의 지젝의 관심사는 오늘날 철학의 전문영역으로 여겨지는 부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거의 전 방위로 뻗어 있으며, 심지어 영화나 tv 드라마 혹은 농담까지도 그의 사유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런 식의 폭넓은 관심, 혹은 분과학문 체계를 넘어서는 것 자체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제임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중요한 것은 분과학문 체계에 갇히지 않고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폭넓은 관심 분야는 이러한 그의 태도의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지젝이 오..

글쓰기의 어려움(1): 제임슨의 경우

1. 미국의 맑스주의 학자이자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주 난삽하고 난해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많은 혐의와 비판을 받아왔다. 말하자면, 비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식인이 배운 티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역사의 발전을 위해 싸운다는 진보적 지식인조차 그토록 어렵게 글을 써야 하는가? 왜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글이 난해하다는 지적이 단지 독자들의 이해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식의 고도로 복잡한, 매개된 글쓰기가 자명한 현실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당면한 싸움의 전선 자체를 흐려놓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국의 또 다른 맑스주의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제임슨의 이..

자유, 필연성, 헤겔. (2): 한반도의 분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3. 헤겔이 이 문제를 다루는 곳은 제2권 "본질론"의 제3부 "현실성" 부분이다. 이 부분은 혹자에 의하면 "헤겔 철학의 분수령"을 이루는 곳으로, 헤겔의 중요한 테제인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 혹은 "필연에서 자유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제3부의 제2절의 소제목 역시 "현실성"인데, 여기서 그는 소위 양상 범주, 즉 우연성과 필연성,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해 논술한다. 그는 이를 세 가지 형식에 따라 설명하는데, 이 세 형식은 다음과 같다. a. "우연성 혹은 형식적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 b. "상대적 필연성 혹은 실재적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 c. "절대적 필연성." 이 세 형식은 각각 "형식적,"  "실재적," "절대적"인 것이라 말해질 수 있는데, 헤겔은 a와 b에서..

자유, 필연성, 헤겔 (1)

1.한때 옛 소련에서 나온 철학교과서들이 유행하던 시기, 자주 듣던 이야기 중에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에 이 말은 역사의 합법칙적 필연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었는데, 말하자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굴러가게 돼 있으며, 이와 같은 역사의 객관적 필연성을 이해할 때 인간은 자유로와진다, 정도의 뜻으로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했다. 즉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역사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역사의 법칙은 굴레나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어릴 때 소설책에서 본 후 나에게 인상깊게 남아있었던, "운명은 순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