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머리아픈 글들'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2.02.05 지젝의 글쓰기: 글쓰기의 어려움(2) by vinoveri
  2. 2012.01.16 글쓰기의 어려움(1): 제임슨의 경우 by vinoveri 2
  3. 2009.08.28 자유, 필연성, 헤겔. (2): 한반도의 분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by vinoveri 4
  4. 2009.06.30 자유, 필연성, 헤겔 (1) by vinoveri 2

2.

분과학문을 넘어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철학계의 스타 중 하나인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철학자로서의 지젝의 관심사는 오늘날 철학의 전문영역으로 여겨지는 부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거의 전 방위로 뻗어 있으며, 심지어 영화나 tv 드라마 혹은 농담까지도 그의 사유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런 식의 폭넓은 관심, 혹은 분과학문 체계를 넘어서는 것 자체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제임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중요한 것은 분과학문 체계에 갇히지 않고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폭넓은 관심 분야는 이러한 그의 태도의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지젝이 오늘날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로는 무엇보다 논증 내지 논변(이른바 argument)을 사례로 대신하는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글을 전개해 나간다기보다는 엮어나간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한데, 그것은 많은 곳에서 그가 일반적으로 철학의 전형적 글쓰기 방식으로 인식되는 논증을 거의 무차별적인 사례의 연속적 제시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서 제시되는 무차별적 사례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으면서 어려운 철학적 논의를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막상 그의 글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생각보다 그의 글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사실 그의 글은 아주 어렵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의 글이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이나 세세한 논증을 생략하고 이를 사례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그의 글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례는 그 밑에 깔려 있는 논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한다. 독자들은 이 사례들을 통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기저의 논리를 다시 재구성해내야 한다. 그의 사례들이 재밌긴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건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이는 그 기저의 논리를 정확히 파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 그의 글은 많은 전문적 논의들을 전제하고 있다. 예컨대 (정신분석 및 맑스주의와 함께) 그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원천으로 꼽히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그의 논의에는 앨리슨(Henry Allison)이나 롱그니스(Beatrice Longuenesse), 혹은 피핀(Robert Pippin)과 같은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일급 학자들의 해석,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나오게 된 수용사적 맥락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 논의들을 잘 알지 못하면,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주장은 사실상 이해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의 글에서 전문적이고 이론적인 논의가 사실상 생략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논의는 표면적인 글쓰기 과정에서 숨겨져 있을 뿐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한자한자 의미를 따져가는 전문가들의 전문적 논의가 쓸데없는 짓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글과 보다 본격적인 다른 철학적 저서들, 예컨대 칸트나 하이데거의 책들의 차이는 현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며, 그의 논의 역시 본격적 철학적 논의의 한 형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그의 본격적인 철학적 저서들은 점점 이러한 전통적인 책들의 형태와 유사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들은 과거의 글들에 비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왜 하필이면 논증보다 사례를 중시하는 이와 같은 글쓰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겠다는 것 이상의 욕망이 깔려 있다. 내가 보기에 그가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그가 그들과 다른 욕망, 즉 흔히 말하는 철학적 논의 이상의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아카데미의 다른 많은 철학자들과는 달리 철학적 논증과 정당화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적 논의가 철학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유한 영역, 철학을 철학이게 하는 정상적인 규범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사회의 다른 부분들이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진정한 사유에 대한 욕구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이는 현실과의 만남 속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들뢰즈의 반()철학적 태도를 반대하며 철학을 옹호하는 바디우를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 b), 8-10 참조.)

그리고 논증을 사례 제시로 대체하는 그의 글쓰기 방식은 여러 철학적 논의들을 현실과 매개하여 전개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전략적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사례는 고도로 추상적이어서 현실과의 접점 없이 진행되기 쉬운 철학적 논의를 현실과 관련시켜 전개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는 사례를 연속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철학적 논의가 이미 현실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지젝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글쓰기를 채택하게 만든 그의 욕망이다. 그것은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의 독자적이고 완성된 영역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아카데미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 철학은 철학을 넘어설 때에만 진정한 철학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지젝의 글쓰기에 깔려 있는 그의 욕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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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맑스주의 학자이자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주 난삽하고 난해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많은 혐의와 비판을 받아왔다. 말하자면, 비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식인이 배운 티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역사의 발전을 위해 싸운다는 진보적 지식인조차 그토록 어렵게 글을 써야 하는가? 왜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글이 난해하다는 지적이 단지 독자들의 이해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식의 고도로 복잡한, 매개된 글쓰기가 자명한 현실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당면한 싸움의 전선 자체를 흐려놓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국의 또 다른 맑스주의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제임슨의 이른바 변증법적 비평이 첨예한 실제 현실을 외면하고 당면한 싸움을 변증법이란 이름하에 해소해 버린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저 세련된 변증법이 밥 먹여주냐라는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의 거친 진실,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세속적비평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이경덕, <‘세련된변증법이 아닌, 현실에 밀착된 변증법을 향하여>, http://blog.aladin.co.kr:80/mramor/1696117 참조. 거친 사고(plumpes Denken)’당대의 복잡하고 사변적인 맑스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내세운 브레히트의 모토였다. “하지만 거친 사고야말로 현실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거칠게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거친 사고, 그것은 위대한 자들의 사고이다.”(브레히트, <서푼짜리소설> 중에서)) 나아가, 이러한 그의 글쓰기 방식이 결국 진보적 대중운동으로부터 지식인이 고립되어 있는 미국이라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의 상황을 보여줄 뿐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제임슨 또한 이런 식의 비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식의 복잡한 글쓰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해왔다. 그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백지상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계급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문화 등의 상황과 맥락 안에 들어와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맥락을 탈신비화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브레히트가 말하는 거친 사고 역시 과도하게 복잡해진 헤겔주의나 철학적 맑스주의라는 당대적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글 <역사 속의 비평>의 시작 부분에서.)

나아가,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하나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 특히 그가 몸담고 있는 영미의 아카데미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파편화된 현실에 집착하는 경험론적 사고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밀폐된 칸막이로 분할하고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법률적인 것, 역사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을 면밀히 구분함으로써 특정 문제에 함축된 모든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창비), 359-60)이다. 이러한 방식의 사고는 많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양산하지만, 사회생활 전체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는 총체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복잡한 글쓰기는 이러한 자본주의가 낳은 사물화와 파편화, 특히 미국의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학문적 풍토에 대응하기 위한 그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의 글 곳곳에서 행해지는 거의 무차별적인 인용과 전유 내지 이른바 그의 약호전환(transcoding)’ 전략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비록 그에게 많은 프랑스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자의식, 이를테면 스타일에의 의지(will to style)’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점점 고도로 분화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는 오늘날 우리의 학문 풍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사실, 오늘날 대학민국의 제도권 학문의 기본 모델이 바로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미국의 아카데미이다.) ‘통섭이나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 연구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것도 이러한 학문적 풍토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임슨의 주장이 이러한 요구와 다른 점은 분과학문 체계의 해체 자체가 그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여러 간학문적 연구에 대한 요구들이 흔히 보다 폭넓은 지식에 대한 요구, 즉 분과학문적 지식을 넘어선 포괄적 지식에 대한 요구에 그치는 반면, 제임슨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분과학문으로 나눠져 있을 때 볼 수 없는 것, 분과학문으로는 알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앎에 대한 요구라 할 수 있다.

결국 언어적 매개를 넘어선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앎 자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제임슨이 이글턴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그는 이 현실이란 것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끊임없이 보여주고자 한다. 그의 글이 그처럼 복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토질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못 생겼다 욕한다." (브레히트)



(*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블로그의 먼지를 털어내고 이제 다시 활동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예전처럼 힘을 합쳐 활발한 대화를 다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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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헤겔이 이 문제를 다루는 곳은 <논리학> 제2권 "본질론"의 제3부 "현실성" 부분이다. 이 부분은 혹자에 의하면 "헤겔 철학의 분수령"을 이루는 곳으로, 헤겔의 중요한 테제인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 혹은 "필연에서 자유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제3부의 제2절의 소제목 역시 "현실성"인데, 여기서 그는 소위 양상 범주, 즉 우연성과 필연성,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해 논술한다. 그는 이를 세 가지 형식에 따라 설명하는데, 이 세 형식은 다음과 같다.

a. "우연성 혹은 형식적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
b. "상대적 필연성 혹은 실재적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
c. "절대적 필연성."

이 세 형식은 각각 "형식적,"  "실재적," "절대적"인 것이라 말해질 수 있는데, 헤겔은 a와 b에서 각각 "형식적" 범주들과 "실재적" 범주들을 통해 이전의 철학들이 가지고 있던 양상범주에 대한 견해들을 비판 - 정확히 말하면, 지양 - 한 후, c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도출해낸다. 즉 "절대적 필연성"이 헤겔의 입장이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헤겔의 생각을 하나하나 상세히 따라가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다만, 필연성과 관련한 헤겔의 입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우연성과 필연성을 추상적으로 대립시킬 때, 이들은 추상적으로 동일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연성과 필연성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우연성은 필연성이 아닌 것으로, 필연성은 우연성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우연성과 필연성을 대립시킬 때, 필연성은 우연성이 되고, 우연성은 필연성이 된다. 그래서 필연성은 우연성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연성은 필연성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우연은 필연이 되고, 필연은 우연이 되어 이 둘은 이제 하나가 된다.

이것이 헤겔의 "절대적 필연성"이다. 필연성은 "절대적"이다. 즉 모든 것은 필연이며, 필연성 바깥은 없다. 하지만 이 말은, 흔히 이 말로 직접 연상하게 되는, 세상에는 그 어떤 우연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연처럼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필연이라는(앞의 글에서 말한, 스탈린주의의 '철의 법칙'), 그런 뜻이 아니다.

헤겔이 이 말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상 지금 말한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즉 세상에는 필연성 밖에 없지만, 이 필연성은 “우연성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성의 형식 안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필연적 과정”(Slavoj Zizek, The Metastases of Enjoyment, 영어본, 35. 이 책은 한글 번역이 좋지 않아 영어본을 인용했습니다.)이라는 것이다.

필연성이 "우연적 형식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보자. <한겨레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정경모의 회고담은 해방 후 단정수립 과정에 얽힌 한 에피소드를 전해준다.

"'태곳적부터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던 조선을 둘로 가르는 단독선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해 오던 사람이 메논 단장 아니오이까. 그런데 1948년 3월 12일 유엔한국위원단 표결에서 그는 찬성표를 던져 결국 4 대 2의 다수결로 단독선거안이 통과됐소이다.
메논의 돌연한 변심에는 시인 모윤숙의 미인계가 주효했던 까닭인데, 이에 대해서는 모윤숙 자신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오이다.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신동아> 1983년 2월호)
메논 자신은 또 뭐라고 하고 있나.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렸다는 것은 내가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메논 자서전> 1974년 런던)
사소한 우연이 어떻게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메논과 모윤숙의 치정 관계는 매우 적절한 일례를 남겨주었노라고, 호주국립대학 매코맥 교수는 말하고 있소이다.(<씨알의 힘> 제9호 1987년 10월)"
(정경모, "길을 찾아서," 야합이 낳은 '반쪽 건국' 중에서(<한겨레신문> 20090614,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0326.html)

사소한 우연이 얼마나 큰 역사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이만큼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례도 잘 없을 것이다. 이 조그만 사건, 모윤숙의 미인계와 그녀에 대한 메논의 개인적 감정은, 흡사 북경에서의 나비의 몸짓 하나가 어느 순간 뉴욕의 태풍을 가져오듯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분단과 그로 인한 대립과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절대적 필연성이 "우연의 형식 안에" 있다는 말은 이처럼 "사소한 우연이 ...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우연의 연속이 바로 역사이고 인간사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헤겔의 절대적 필연성이다.

그렇다면, 이는 법칙이나 섭리 같은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또, 세상 일에는 거시적인 큰 흐름이나 구조적인 힘이 따로 있어서 개인이란 무력한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반대한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절대적 필연성은 우연성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필연성"이다. 이것은 왜 필연성인가? 역사가 우연의 연속이고, 그것의 집적물이라면, 이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성이라 불릴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시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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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녹두출판사의 [세철]를 기억하는지? 또, 콘스탄티노프라는 이름을 기억하는지?

한때 옛 소련에서 나온 철학교과서들이 유행하던 시기, 자주 듣던 이야기 중에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에 이 말은 역사의 합법칙적 필연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었는데, 말하자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굴러가게 돼 있으며, 이와 같은 역사의 객관적 필연성을 이해할 때 인간은 자유로와진다, 정도의 뜻으로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했다. 즉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역사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역사의 법칙은 굴레나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어릴 때 소설책에서 본 후 나에게 인상깊게 남아있었던, "운명은 순응하는 자는 데리고 가고, 거스르는 자는 끌고 간다"라는 세네카의 말과 비슷한 울림으로 이해했다.)

(* 여기서 쓰인 "객관성"의 의미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으로는,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믿음의 객관성" 부분(국역본 69-73)을 참고할 것.)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난 후, 옛 소련 교과서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당시에 이 말을 쓰던 사람들이 암암리에, 혹은 명시적으로 상정했던 필연적 역사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사회주의의 "필연적" 도래였다), 사실 이와 같은 역사관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역사관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국민적 개그맨에 가까운 인물이 된, 한때는 민주투사였던 전직 대통령은 한참 민주화투쟁을 할 당시 “달게(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기독교인들은 흔히, 지금은 이단들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언젠가는 복음의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좌빨"들은, 민주화된 세상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며, 지금은 그러한 세상이 오기 위해 잠시 진통을 겪고 있는 반동의 시기일 뿐이라 생각하고, 이른바 "수구꼴통"들은 아무리 많은 촛불들이 세상을 어지럽게 해도, 언젠가는 법질서가 실현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87년 당시의 YS. 나는 그의 민주화투쟁을 기억하고 있으며, 특히 5공 당시의 23일간의 단식을 기억하고 있기에, 나는 지금의 그가 조금은 안타깝다. 신문 사회면에 1단짜리 단신으로 소개되던 단식 당시의 그에 대한 호칭은 '어느 재야인사'였다.


이 서사들은 모두, 과정에 무슨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도달하게 되는 역사의 목적지는 애초부터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다(구체적인 목적지는 다들 다르겠지만). 그게 역사이고, 그게 정의이고, 그게 섭리이고, 그게 필연인 것이다. 이와 같은 통속적 역사관들은 공산주의의 도래가 강철같은 역사의 법칙이라 확신했던 스탈린주의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관들은 그들이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설정한 역사적 서사 자체가 개인이나 집단의 신념에 불과한 것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증명해야 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논점 선취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에 빠져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 역사관은 역사의 필연적 흐름이란 것이 따로 있어서, 이는 인간의 실천적 노력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즉 섭리와 같은 것이 미리 있어서,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든, 또 어떤 노력을 하든 달라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2.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은 엥겔스가 <반뒤링론>에서 한 말이다. 이는 이후 정통 맑스주의자들에게 계승되어 스탈린주의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격상된다. (정통 맑스주의란 옛 소련과 동구권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주의의 공식적 이념으로서의 맑스-레닌주의를 말한다. 이는 흔히 루카치나 알뛰세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 맑스주의와 대비된다.)

스탈린주의는 엥겔스의 생각으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는다. 하지만 정통 맑스주의 내지 스탈린주의의 많은 것이 사실 맑스 자신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엥겔스의 생각 역시 맑스 자신과는 다른 부분이 많이 있으며, 특히 <반뒤링론>이나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언>에 나타나는 엥겔스의 철학적 사유는 통속화된 것이 많아 맑스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많이 있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이해, 넓게 말해 필연성에 대한 이해는 흔히 그 뿌리를 헤겔에 두고 있다고 생각되어져 왔다. 그래서 서구에서 60년대 이후 스탈린주의에 대한 투쟁이 벌어졌을 때, 그들이 설정한 목표는 “반헤겔주의”였다. 즉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뿌리가 헤겔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헤겔을 처단하면 스탈린주의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리면, 헤겔은 스탈린주의의 암호명code name이었다.

이와 같은 통념은 국내에도 널리 퍼져있으며, 특히 프랑스철학이 유행하면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예컨대 대중적 철학교양서로 잘 알려져 있는 <철학과 굴뚝청소부> 같은 책 역시 헤겔에 대한 이와 같은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책은 헤겔에 대해 적대적인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어서, 그것이 세계에 현현하게 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념이 진실은 아니다("Das Bekannte ist nicht das Erkannte"). 이와 같은 역사관, 이런 식의 주장은 헤겔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사실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관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이가 헤겔이다. (최소한 헤겔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인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그 어디에도 이런 식의 서술은 없다.) 이 글은 헤겔의 필연성 개념을 통해 이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투 비 컨티뉴드, 慾知後事如何, 且聽下回分解.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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