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머리아픈 글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과 좋은 삶

vinoveri 2024. 8. 24. 02:15

 

1. 

행복이라는 말은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상적이다. 한여름 심한 갈증을 겪을 때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잔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며,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가족과 평화로운 저녁시간을 함께 보낼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뤄냈을 때, 예컨대 열심히 준비해서 원하는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게 됐을 때도 우리는 행복감을 맛본다.

이러한 경우들을 일반화해보면, 행복이란 내 안의 어떤 심리상태, 그것도 나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감정이나 느낌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그것은 내가 뭔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혹은 그 추구의 결과로 뭔가를 성취했을 때 내면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나 만족감과 관련되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과 연관되는 이러한 긍정적 감정, 즉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즐거움이나 쾌감이 우리 내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주관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이 단지 주관적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행복을 객관적인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주장은, 내가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다 해도, 누군가가 나에게 “그건 진정한 행복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그게 행복이 아니라니? 이런 주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런데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자. 건강을 위해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 유혹을 이기지 못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거나, 당뇨병 때문에 식단 조절을 하고 있는 환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치즈케익을 보고서는 참지 못하고 먹게 되었다고 해보자. 아마도 그는 그 순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아 행복해!” 마찬가지 경우로, 오랫동안 마약을 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마약중독자가 드디어 마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 또한 이 순간 똑같이 말할 것이다. “아 행복해!” 우리는 그가 지금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면 단지 내면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이나 만족감이 행복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행복은 우리의 주관적인 감정상태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일까? 진정한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심리적 만족 말고도 뭔가가 더 있어야 하는 것일까? 행복에 객관적 기준이 있을까? 만일 있다면 무엇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2. 

[생략] 

 

 

3. 

행복의 본질이 신체적 쾌락에 있다고 생각하든 정신적 쾌락에 있다고 생각하든 쾌락주의자들(과 공리주의자들)에게는 쾌락이 곧 행복이며, 따라서 행복은 우리가 내면에서 느끼는 어떤 주관적인 심리상태가 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모두 행복에 대한 주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관주의자들은 행복이 내면의 감정이라는 점에서 개별적이며, 따라서 당사자가 그렇게 느끼면 좋은 것일 뿐 그 이상의 다른 판단기준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관주의적 입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행복은 단지 주관적 심리상태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이들은 객관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들을 대표하는 이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 그는 단적으로 행복을 ‘좋은 삶’(=잘 삶, good life)으로 정의한 후, ‘잘 삶’이라는 개념 자체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답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잘 산다는 것은 두 가지 관념, 즉 ‘잘’(good, well)+’삶’(life)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잘’ 혹은 ‘좋음’에 대해 말해보면 좋음은 좋지 않음과 대비되는 말이며, 따라서 ‘좋음’이라는 관념은 이미 좋음과 좋지 않음의 구분을 전제한다.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삶’은 생명의 맥락에서 이해되며(‘삶’이든 ‘생명’이든 영어로 하면 life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 역시 생명체로 취급된다.

이 두 가지 생각을 합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모든 삶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잘 사는 삶이 따로 있고 그렇지 못한 삶이 따로 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렇게 살거나 저렇게 살거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잘 사는 삶이 따로 있는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인가? 그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생명체가 생명체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생명체가 생명체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생명체와 구분되는 생명체의 근본적 특징이 목적 추구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비생명체의 예로 못에 대해 생각해보자. 못은 생명이 없는 일종의 금속이다. 못 하나를 야외에 놓아두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도 맞고 바람도 맞으면서 녹이 슬게 될 것이다(산화작용). 이처럼 못은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못은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는 없으며, 그래서 녹이 슬고 싶을 때 녹이 슬고 녹이 슬고 싶지 않다고 자신에게 녹이 슬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 반면 생명체는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즉 생명체의 변화는 생명체의 욕구에 따라 일어나며, 생명체는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생명체는 뭔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존재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생명체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목적 추구 활동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다. 이것이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차이이다. 이런 것이 생명체의 근본적 특징이라면, 생명체는 자신의 목적을 충실하게 추구할 때 생명체답게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생명체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고양이는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고 놀고 싶을 때 뛰어놀 수 있다면 생명체답게 살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가 주인을 잘못 만나 먹을 것을 못먹고 굶거나 학대받으며 지낸다면 그것은 생명체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생명의 한 종류이면서도 다른 생명체들이 갖지 못한 고유한 특징을 가진다. 즉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능과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이러한 행동방식에 따를 뿐만 아니라 이성에 따라서도 행위한다.*** 이성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고유한 특징이라면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기능에도 잘 부합해서 살아가는 것이 생명체답게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이 인간 고유의 잘 삶의 방식이며 이러한 인간 고유의 잘 삶이 바로 행복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성에 따라 살때에만 행복하다.

이성은 이유를 묻고 따지는 능력이다. 따라서 생명체로서의 인간 역시 목적 추구 활동을 하지만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이러한 활동을 할 때 이 활동 자체의 이유나 의미를 묻게 된다. 즉 자신이 하는 행위는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인지, 나아가 이 활동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묻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물음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욕구를 만족시키며 살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삶의 온전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자연적 욕구를 충실히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먹고 사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며 생존(혹은 생계) 자체가 삶의 목표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적 욕구가 만족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의미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온전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액 연봉의 직장에 다니다가 그 직장생활에 만족하지 못하여 더 고생스럽지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그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 내지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하는 ‘좋은 삶’이며 인간의 행복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심리적 만족과 같은 우리의 감정과 관련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즉 그는 행복의 주관적 측면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에게도 행복한 삶은 즐거운 삶이며, 하기 싫은 일을 타자의 의지에 끌려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 측면은 행복에 따라오는 것일 뿐 행복 자체는 아니다. 행복은 단지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다. 행복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며 사는 좋은 삶이며, 좋은 삶과 무관한 감각적 즐거움은 행복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좋은 삶을 행복의 객관적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관한 객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삶의 목표를 세우고 또 그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높은 연봉, 넉넉한 재산, 좋은 평판, 권력과 지위 등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다양하고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행복이다. 이처럼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이 모든 것의 궁극목적이 된다는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최고선’이라고 부른다.

이런 식의 행복 개념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에서도 드물지 않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가 염두에 두는 것이 바로 이런 식의 행복이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고민할 때, 그래서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할 때 목표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좋은 삶으로서의 행복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소확행’)도 소중하지만, 삶 전반의 설계가 잘못된다면 어느 순간 일상의 행복이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삶을 기준으로 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객관주의적 행복 개념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지금의 논의는 서양 윤리학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1장의 첫 구절에 대한 해석에 해당한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다. “모든 기예와 탐구,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왔다.” 인간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면서 좋음(=가치) 추구를 행위의 원리로 제시하는 서양의 목적론적 윤리학의 출발점이 바로 이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경험적 관찰로부터 필연적 앎으로 상승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형적인 철학적 절차를 보여주는 이 구절에는 약간의 논리적 비약이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기예와 탐구," "행위와 선택")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모든 것”ㅡ즉 인간이든 다른 동물이든ㅡ은 좋음을 추구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때의 “모든 것”을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둔 것이 모든 생명체가 아니라 모든 인간일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애매함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잘 정돈된 출판용 텍스트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희랍 사람들이 자연적 욕구에 묶인 생명을 zoe(즉 mere life)라고 부르고, 이에 대비하여 윤리적 행위나 정치적 활동이 가능한 실천적 존재로서의 생명을 bios라고 부르면서 이 둘을 대비시켰다는 점을 감안하면(즉 칸트식으로 말해 자연필연성 vs 자유의 대비), 한낱 필연적 존재인 비인간 생명의 경우에는 좋은 삶의 여지가 없고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능력을 가진 존재인 인간의 경우에만 그저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의 대비가 나타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해석의 여지도 있다. 

***양치질을 처음 배우는 어린 아이는 처음에는 무작정 양치질을 한다 해도 어느 순간 이것이 구내 건강을 위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며, 그래서 싫어도 양치질을 열심히 하게 된다. 하지만 똑같이 양치질을 정말 싫어하는 집고양이 메피에게 계속 양치질을 시키고 또 이것이 구내염이나 치주암을 예방하기 위한 것임을 그에게 아무리 설명해준다 해도, 메피가 이 의미를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근본적 차이이다. 사람은 이유를 묻지만 고양이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래서 고양이를 훈육할 수는 있지만 그를 이해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고양이를 훈련할 수는 있지만 교육할 수는 없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다른 동물들은 대개 본성대로 살고, 그 가운데 소수는 습관에 따라 산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에 따라서도 살아간다. 사람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면 이성 때문에 습관과 본성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도 많다"(<정치학> 제7권 13장 1332b2-7).

이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 구절도 언급할 만하다. "... 우리는 여러 감각 가운데 어떤 것도 지혜로 여기지 않는데, 분명 감각은 개별자에 대해 더 없이 중요한 지식이지만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왜 그렇게 있는지 말해주지 않으니, 감각이 알려주는 것은 예컨대 불이 뜨거운 이유가 아니라 불이 뜨겁다는 사실이다" (강조는 인용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감각의 특성에 대해 말하면서 '사실'과 '이유'를 구분하고 있다. 즉 감각은 "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줄 뿐 불이 왜 뜨거운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는 없다. "불이 뜨거운 이유"를 따지고 묻는 능력은 이성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은 바로 자기목적을 실현하며 사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의 이른바 ‘기능논변’에 대한 필자의 해석이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이라면 감각적 즐거움이 언제나 활동 자체에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행복한 삶은 좋은 삶이고 자기 자신이 잘 살고 있음을 지각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 구절 참조. “왜냐하면 살아 있다는 것은 본성상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지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9권 9장 1170b 1–3).] 이처럼 잘 사는 삶의 경우, 잘 삶 자체가 스스로에게 지각된다. 다시 말해, 행복한 삶은 '사는 듯이' 사는 것, 즉 살아있음을 스스로 느끼면서 사는 삶이다. 예컨대, 직장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 영혼없이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뭔가를 추구하며ㅡ자기를 위해, 즉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을 위해ㅡ사는 삶, 이를테면 '행복'은 여가에만 느끼고 노동은 이 시간을 위해 희생하는 삶ㅡ맑스식으로 말해 소외된 노동의 삶ㅡ은 행복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러한 삶, 즉 노동과 여가가 분리된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