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머리아픈 글들

내릴 수 없는 기차 2: 맑스와 상품물신 (1)

vinoveri 2024. 7. 16. 18:11

 

2.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는다는 걸 알아도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차에서ㅡ인용자] 내릴 수 없게 만드는 위력”이 자본주의에 내장되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또 이를 해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이가 <자본>을 쓴 맑스였다.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인간형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이는 베버만이 아니라 맑스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베버와 달리 맑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베버와 달리 그는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데 근면이나 성실과 같은 어떤 개신교적 가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그 어떤 긍정적 가치도 동원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재생산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통해 의식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나도 모르게 나를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만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상품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실천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행위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을 만들어내고 또 유지·강화하듯이,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상품에 대해 이와 같은 행위를 일상적으로 반복하며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맑스는 상품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행위를 상품에 대한 물신숭배commodity fetishism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상품물신은 흔히 이해하듯 우리의 일상적 인간관계를 화폐적 관계로 환원하는 것ㅡ"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최고야!"라는 믿음 아래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상품물신에 관한 논의를 통해 해명하고자 한 것은 상품교환이라는 자본주의적 예배의 ‘수행적’ 효과에 의해 우리가 우리의 명시적 앎과 분리된 실천적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맑스의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 맨 첫머리에 나타나 있는 맑스의 자본주의관ㅡ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상품교환이 일반화된 사회’이다ㅡ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자본>은 의외로 자본이 아닌 상품을 분석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잘 알려진 <자본>의 본문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서 현상하며,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을 분석하는 데서 시작된다. (Marx, MEW23, 49, 김수행 역, <자본> 1-상, 43, 번역 일부 수정) 

 

맑스는 자신의 연구대상이 초역사적 상황이 아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특수한 사회임을 밝히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다시 말해 상품은 여기서 특수한 사회적 범주로 제안되고 있으며, 오직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부의 기본형태”가 된다. 

 

물론 교환을 위해 생산되는 재화인 상품이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에 없었을 리가 없다. 예컨대 중세 초기의 서양 봉건사회에서는 “아주 적은 양의 재화만이 교환”되었고 상품은 “이례적”이었다. ”재화의 대부분은 농업 생산물이었으며, 이것들은 소비를 위해 생산되었거나 혹은 지주들(귀족, 교회 등)에게 바쳐졌[다]”(미하엘 하인리히, <새로운 자본 읽기>(꾸리에), 59-60). 하지만 상품교환이 국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화의 대부분이 교환의 대상이 되는 방식으로 상품교환이 일반화된 사회는 자본주의가 처음이며, 이런 사회에서는 부가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떠오르게 되며(”현상”), 상품은 부의 “기본형태”가 된다. 

 

그런데 상품교환이 일반화되면 당연히 상업이 발달하고 교환이 활발해지겠지만, 일반화의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상품교환이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회와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핵심은 교환이 일반화됨으로써 교환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교환의 '양적 비율'과 관련된다. 

 

교환이 국지적인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상황에서는 물품들이 다양한 비율로 교환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의자를 한 번은 두 장의 아마포와, 또 다른 한 번은 세 장의 아마포와 교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환이 일반화되고 나면 교환은 이처럼 상이한 비율로 행해질 수 없다. 교환의 비율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 통일되어야 한다(폴라니를 빌려 말하면, 이제 시장은 자기조정시장만 남게 된다). 왜 그런가? 의자 하나를 아마포 두 장이나 달걀 100개와 교환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상황이라면 달걀 100개는 반드시 아마포 두 장과 교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상황에서 달걀 100개를 아마포 한 장과 교환할 수 있다면 나는 교환행위를 몇 번 반복하기만 해도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단 한 장의 아마포를 100개의 달걀과 교환한다. 그다음 100개의 달걀을 의자 하나와 교환한다. 그다음은 의자를 두 장의 아마포와 교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환만으로도 내가 가진 아마포의 양은 두 배가 된다. 그리고 수차례의 교환행위를 통해서 내 재산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하인리히, 61)

 

21세기 독일에서 나온 <자본> 읽기의 중요한 성과.

이렇게 되면 개별 행위자는 더 이상 교환의 비율을 자기 맘대로 정할 수 없으며, 일반화된 교환비율에 따라 교환을 진행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주류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내가 가진 상품을 비싸게 팔고 다른 상품들을 싸게 사려는 것은 단순히 나의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교환관계와 아무 상관 없이 살아도 될 만큼 부유”하거나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적 관계 바깥으로 나가 살겠다고 결심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달리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다른 대안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교환의 논리,” 즉 상품교환이 일반화된 사회가 제시하는 “일정한 형태의 합리성”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하인리히, 68). 교환의 양적 비율은 바로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 행위자를 지배하는 규범적 구속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 개인’의 기원이다. 즉 개별 행위자의 합리적 행동은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자연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행위자가 통일된 교환비율의 명령을 자신의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