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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머리아픈 글들

내릴 수 없는 기차 1

by vinoveri 2024. 7. 6.

 

1. 

백낙청은 탈성장론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맥락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자본주의 나쁜 건 알지만 자본주의 무서운 건 덜 실감하는” 편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351면). 그의 이러한 발언은,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체제전환’이 요구되며 체제전환을 위해서는 ‘경제적 성장주의’ 담론의 극복이 긴요한 과제임을 주장하는 탈성장주의적 운동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체제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이 탈성장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얼마만큼의 성장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지를 연마”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를 도외시한 당위론”, 즉 현실과 분리된 “탁상공론”에 그칠 것이며, 이렇게 되면 “대중은 탈성장론을 일부 ‘잘난 사람들의 거룩한 말씀’ 정도로 들을 뿐 적극적으로 함께할 마음이 안 생길 것”(같은 책, 350-1)이라는 점을 우려하는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꼭 탈성장론자들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많은 사람들을 겨냥한 말이기도 하다. 

 

백낙청이 자본주의를 그냥 “나쁜” 체제라고 하지 않고 “무서운” 체제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무서운’ 것은 ‘나쁜’ 것과 어떻게 다를까? 그의 지적이 자본주의의 ‘나쁨’보다는 자본주의의 ‘무서움’을 환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물음은 중요하다. 사실 자본주의는, 그가 같은 글에서 인용하는 백무산의 싯구를 빌려 말해보면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도 없는,” 내리려고 하면 “치명상”을 입는 기차이다.

 

 

달리는 기차를 본다 멈추지 않는 기차를
멈추지 않아 아무나 탈 수 없는 기차를
내릴 수도 없다 그만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도 없는 기차
기차의 속도로 달려야만 탈 수 있는 기차
내리고 싶을 때 내리는 자는 치명상을 입는다

ㅡ 백무산, <기차에 대해서> 1연 ㅡ

 

여기서 자본주의는 끝없이 달리는 기차에 비유된다. 자본은 증식 자체를 목적으로 하며, 증식을 멈춘 자본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니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끝없는 확대를 추구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만든다. 끝없이 성장하는 암세포가 유기체의 다른 부분들을 모두 파괴하듯이, 자본주의 또한 확대과정에서 시스템 안팎의 모든 부분들을 망가뜨린다. 그것이 인간관계이든 자연이든. 탈성장에 대한 시급한 요구는 이로부터 제기된다. 

 

백무산과는 다른, 김정환의 기차는 기억하는지? “끝끝내 아내는 운다 전교조의 아내/우리는 쁘띠 아니냐고, 애새끼들은/어쩔꺼냐고, 일순 기차는/덜컹대고 그 틈에/핑 돌던 것이 흩뿌려/차창 밖에 비가 내린다 그러나/아내여 어차피 자본주의에서/최고의 사랑은 계급동맹이다/덜컹대며 기차는 달리고” (「기차에 대하여·23」 일부.) 이념의 시대, 김정환은 기차라는 근대적 이미지를 빌려 어떤 고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실현될 수밖에 없는 계급해방의 필연성을 김수영 풍으로 노래했다면, 이제 백무산에게 기차는 무너지지 않고 끝없이 진행될 것만한 같은 자본주의이다. 김정환의 기차는 전교조 아내의 눈물을 뿌리치고 끝없이 달리지만, 백무산은 기차의 정지를 꿈꾼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암세포와 같은 끔찍한 체제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탈성장 내지 탈자본주의의 과제가 시급히 제기된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에 관한 이런 익숙한 이야기들은 자본주의의 ‘나쁨’에 관한 것일 뿐 자본주의의 ‘무서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무서움은 다른 데, 즉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는다는 걸 알아도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내릴 수 없게 만드는 위력”(같은 책, 351)을 자본주의가 갖고 있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그것의 ‘나쁨’을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체제를 어쩔 수 없는 선택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어떤 것이 이 체제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가 무너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당연한 것ㅡ맑스의 말로 하면, “영원한 자연적 관계”(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 한글판[백의] 54. 번역 약간 수정)ㅡ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기차에서 내릴 수 없는 이유는 왜 이 기차에 타고 있을까 아무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저 기차가 왜 우리에게 있을까 아무도 묻지 않을 만큼
우리는 내릴 수 없는 기차를 타고 있다

ㅡ 백무산, <기차에 대해서> 3연 일부 ㅡ

 

나아가 우리는 왜 이 기차에 타고 있을까를 더 이상 묻지 않게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지배계급이 주입한 잘못된 정보, 지배계급에게는 유리하지만 그들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는 잘못된 정보에 속고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지금 진실을 모르고 있을 뿐 제대로 알기만 하면 자본주의를 반대하리라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 즉 자본주의가 얼마나 나쁜 체제인지를 사람들에게 깨우쳐주는 것이다.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내놓는 답변이 이런 것이다. 똑같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끝없이 달리는 기차, 내릴 수 없는 기차에 비유한다 해도, 승객들이 기차에서 내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국열차>는 다르게 설명한다. <설국열차>의 승객들 역시 기차 밖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기차가 멈추고 기차 밖에 발을 내딛는 순간 자신들이 얼어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기차 밖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지배계급이 주입한 거짓 정보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잘못 알기 때문에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며, 이는 특히 머리칸 아이들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칸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이처럼 <설국열차>의 설명은 지배계급의 거짓이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전통적 이데올로기론에 기반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나쁜 체제지만 이는 은폐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자본주의의 나쁨에 주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백낙청은 이와 같은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것은 잘 몰라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리지 못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내릴 수 없게 만드는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왜 이 기차에 타고 있을까를 더 이상 묻지 않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바로 기차의 일부라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진짜 무서움이다. 

 

 

*맑스의 이 원고는 흔히 그 첫 단어를 따 그룬트리세Grundrisse 혹은 요강으로 불리지만, 대학 입시와 관련해서가 아니면 듣기 힘든 이 일본식 번역어보다는 밑그림 혹은 초안, 아니면 개요 정도로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전통적 정의인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 falsches Bewusstsein의 의미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번역이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다. 독일어 Bewusstsein의 우리말 대응어가 ‘의식’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경우 이 단어의 어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Bewusstsein은 be-wusst-sein이며, 여기서 어근인 wusst는 ‘알다’는 뜻을 가진 동사 wissen의 분사형태이다. 따라서 Bewusstsein은 알고 있음, 알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으로 번역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잘못된 앎, 즉 뭔가를 잘못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