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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8 자유, 필연성, 헤겔. (2): 한반도의 분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by vinoveri 4
  2. 2009.06.30 자유, 필연성, 헤겔 (1) by vinoveri 2

3.
헤겔이 이 문제를 다루는 곳은 <논리학> 제2권 "본질론"의 제3부 "현실성" 부분이다. 이 부분은 혹자에 의하면 "헤겔 철학의 분수령"을 이루는 곳으로, 헤겔의 중요한 테제인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 혹은 "필연에서 자유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제3부의 제2절의 소제목 역시 "현실성"인데, 여기서 그는 소위 양상 범주, 즉 우연성과 필연성,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해 논술한다. 그는 이를 세 가지 형식에 따라 설명하는데, 이 세 형식은 다음과 같다.

a. "우연성 혹은 형식적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
b. "상대적 필연성 혹은 실재적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
c. "절대적 필연성."

이 세 형식은 각각 "형식적,"  "실재적," "절대적"인 것이라 말해질 수 있는데, 헤겔은 a와 b에서 각각 "형식적" 범주들과 "실재적" 범주들을 통해 이전의 철학들이 가지고 있던 양상범주에 대한 견해들을 비판 - 정확히 말하면, 지양 - 한 후, c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도출해낸다. 즉 "절대적 필연성"이 헤겔의 입장이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헤겔의 생각을 하나하나 상세히 따라가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다만, 필연성과 관련한 헤겔의 입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우연성과 필연성을 추상적으로 대립시킬 때, 이들은 추상적으로 동일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연성과 필연성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우연성은 필연성이 아닌 것으로, 필연성은 우연성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우연성과 필연성을 대립시킬 때, 필연성은 우연성이 되고, 우연성은 필연성이 된다. 그래서 필연성은 우연성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연성은 필연성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우연은 필연이 되고, 필연은 우연이 되어 이 둘은 이제 하나가 된다.

이것이 헤겔의 "절대적 필연성"이다. 필연성은 "절대적"이다. 즉 모든 것은 필연이며, 필연성 바깥은 없다. 하지만 이 말은, 흔히 이 말로 직접 연상하게 되는, 세상에는 그 어떤 우연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연처럼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필연이라는(앞의 글에서 말한, 스탈린주의의 '철의 법칙'), 그런 뜻이 아니다.

헤겔이 이 말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상 지금 말한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즉 세상에는 필연성 밖에 없지만, 이 필연성은 “우연성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성의 형식 안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필연적 과정”(Slavoj Zizek, The Metastases of Enjoyment, 영어본, 35. 이 책은 한글 번역이 좋지 않아 영어본을 인용했습니다.)이라는 것이다.

필연성이 "우연적 형식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보자. <한겨레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정경모의 회고담은 해방 후 단정수립 과정에 얽힌 한 에피소드를 전해준다.

"'태곳적부터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던 조선을 둘로 가르는 단독선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해 오던 사람이 메논 단장 아니오이까. 그런데 1948년 3월 12일 유엔한국위원단 표결에서 그는 찬성표를 던져 결국 4 대 2의 다수결로 단독선거안이 통과됐소이다.
메논의 돌연한 변심에는 시인 모윤숙의 미인계가 주효했던 까닭인데, 이에 대해서는 모윤숙 자신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오이다.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신동아> 1983년 2월호)
메논 자신은 또 뭐라고 하고 있나.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렸다는 것은 내가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메논 자서전> 1974년 런던)
사소한 우연이 어떻게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메논과 모윤숙의 치정 관계는 매우 적절한 일례를 남겨주었노라고, 호주국립대학 매코맥 교수는 말하고 있소이다.(<씨알의 힘> 제9호 1987년 10월)"
(정경모, "길을 찾아서," 야합이 낳은 '반쪽 건국' 중에서(<한겨레신문> 20090614,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0326.html)

사소한 우연이 얼마나 큰 역사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이만큼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례도 잘 없을 것이다. 이 조그만 사건, 모윤숙의 미인계와 그녀에 대한 메논의 개인적 감정은, 흡사 북경에서의 나비의 몸짓 하나가 어느 순간 뉴욕의 태풍을 가져오듯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분단과 그로 인한 대립과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절대적 필연성이 "우연의 형식 안에" 있다는 말은 이처럼 "사소한 우연이 ...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우연의 연속이 바로 역사이고 인간사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헤겔의 절대적 필연성이다.

그렇다면, 이는 법칙이나 섭리 같은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또, 세상 일에는 거시적인 큰 흐름이나 구조적인 힘이 따로 있어서 개인이란 무력한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반대한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절대적 필연성은 우연성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필연성"이다. 이것은 왜 필연성인가? 역사가 우연의 연속이고, 그것의 집적물이라면, 이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성이라 불릴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시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투 비 컨티뉴드...
Posted by vinov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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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녹두출판사의 [세철]를 기억하는지? 또, 콘스탄티노프라는 이름을 기억하는지?

한때 옛 소련에서 나온 철학교과서들이 유행하던 시기, 자주 듣던 이야기 중에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에 이 말은 역사의 합법칙적 필연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었는데, 말하자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굴러가게 돼 있으며, 이와 같은 역사의 객관적 필연성을 이해할 때 인간은 자유로와진다, 정도의 뜻으로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했다. 즉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역사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역사의 법칙은 굴레나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어릴 때 소설책에서 본 후 나에게 인상깊게 남아있었던, "운명은 순응하는 자는 데리고 가고, 거스르는 자는 끌고 간다"라는 세네카의 말과 비슷한 울림으로 이해했다.)

(* 여기서 쓰인 "객관성"의 의미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으로는,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믿음의 객관성" 부분(국역본 69-73)을 참고할 것.)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난 후, 옛 소련 교과서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당시에 이 말을 쓰던 사람들이 암암리에, 혹은 명시적으로 상정했던 필연적 역사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사회주의의 "필연적" 도래였다), 사실 이와 같은 역사관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역사관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국민적 개그맨에 가까운 인물이 된, 한때는 민주투사였던 전직 대통령은 한참 민주화투쟁을 할 당시 “달게(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기독교인들은 흔히, 지금은 이단들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언젠가는 복음의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좌빨"들은, 민주화된 세상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며, 지금은 그러한 세상이 오기 위해 잠시 진통을 겪고 있는 반동의 시기일 뿐이라 생각하고, 이른바 "수구꼴통"들은 아무리 많은 촛불들이 세상을 어지럽게 해도, 언젠가는 법질서가 실현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87년 당시의 YS. 나는 그의 민주화투쟁을 기억하고 있으며, 특히 5공 당시의 23일간의 단식을 기억하고 있기에, 나는 지금의 그가 조금은 안타깝다. 신문 사회면에 1단짜리 단신으로 소개되던 단식 당시의 그에 대한 호칭은 '어느 재야인사'였다.


이 서사들은 모두, 과정에 무슨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도달하게 되는 역사의 목적지는 애초부터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다(구체적인 목적지는 다들 다르겠지만). 그게 역사이고, 그게 정의이고, 그게 섭리이고, 그게 필연인 것이다. 이와 같은 통속적 역사관들은 공산주의의 도래가 강철같은 역사의 법칙이라 확신했던 스탈린주의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관들은 그들이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설정한 역사적 서사 자체가 개인이나 집단의 신념에 불과한 것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증명해야 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논점 선취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에 빠져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 역사관은 역사의 필연적 흐름이란 것이 따로 있어서, 이는 인간의 실천적 노력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즉 섭리와 같은 것이 미리 있어서,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든, 또 어떤 노력을 하든 달라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2.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은 엥겔스가 <반뒤링론>에서 한 말이다. 이는 이후 정통 맑스주의자들에게 계승되어 스탈린주의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격상된다. (정통 맑스주의란 옛 소련과 동구권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주의의 공식적 이념으로서의 맑스-레닌주의를 말한다. 이는 흔히 루카치나 알뛰세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 맑스주의와 대비된다.)

스탈린주의는 엥겔스의 생각으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는다. 하지만 정통 맑스주의 내지 스탈린주의의 많은 것이 사실 맑스 자신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엥겔스의 생각 역시 맑스 자신과는 다른 부분이 많이 있으며, 특히 <반뒤링론>이나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언>에 나타나는 엥겔스의 철학적 사유는 통속화된 것이 많아 맑스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많이 있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이해, 넓게 말해 필연성에 대한 이해는 흔히 그 뿌리를 헤겔에 두고 있다고 생각되어져 왔다. 그래서 서구에서 60년대 이후 스탈린주의에 대한 투쟁이 벌어졌을 때, 그들이 설정한 목표는 “반헤겔주의”였다. 즉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뿌리가 헤겔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헤겔을 처단하면 스탈린주의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리면, 헤겔은 스탈린주의의 암호명code name이었다.

이와 같은 통념은 국내에도 널리 퍼져있으며, 특히 프랑스철학이 유행하면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예컨대 대중적 철학교양서로 잘 알려져 있는 <철학과 굴뚝청소부> 같은 책 역시 헤겔에 대한 이와 같은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책은 헤겔에 대해 적대적인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어서, 그것이 세계에 현현하게 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념이 진실은 아니다("Das Bekannte ist nicht das Erkannte"). 이와 같은 역사관, 이런 식의 주장은 헤겔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사실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관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이가 헤겔이다. (최소한 헤겔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인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그 어디에도 이런 식의 서술은 없다.) 이 글은 헤겔의 필연성 개념을 통해 이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투 비 컨티뉴드, 慾知後事如何, 且聽下回分解.ㅋㅋ)

 

Posted by vinov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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