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머리아픈 글들

내릴 수 없는 기차 3: 맑스와 상품물신 (2)

vinoveri 2024. 8. 7. 00:36

 

3. 

교환의 양적 비율이 갖는 규범적 힘이 실제 교환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애초에 교환에 참여할 때 행위자의 관심은 상품의 사용가치에 있다. 사용가치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애초에 그는 교환에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환과정에서 이 관심은 사라진다. 상품은 교환가치로 환원되어 행위자들의 관심은 교환가치로 이동한다(하인리히, <새로운 자본 읽기>, 73 참조). 즉 그들은 이제 “자신의 생산물로 자신들이 타인의 생산물을 얼마만큼 얻을 수 있는가, 그래서 생산물들이 어떤 비율로 교환되는가”(MEW23, 89, 김수행 역, <자본> 1-상, 94, 번역 일부 수정)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우리 사고가 개념을 형성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후자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칸트의 사례를 빌려와보자.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에게 개념은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개별 표상”인 감성적 직관과 달리, 우리의 사고가 여러 대상으로부터 공통된 것을 추출하여 일반화한 “보편 표상, 즉 여러 대상에 공통적인 것의 표상”(<순수이성비판> A320/B377)이다(칸트에게 ‘표상’은 직관과 개념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칸트는 학생들에게 논리학을 가르칠 때 다음과 같은 예를 사용한다.

 

예컨대 나는 가문비나무, 버드나무, 보리수나무를 본다. 먼저 이 대상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나는 이것들이 밑둥, 가지, 잎 등과 관련하여 서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계속해서 이것들의 공통점인 밑둥, 가지, 잎 자체에 대해 반성한다. 그리고 나는 이들의 크기, 형태 등을 추상한다. 이로써 나는 나무의 개념을 얻는다.

(Kant, Jäsche Logik §6n1. 강조는 인용자.)  

 

칸트는 여기서 개념형성과정을 “비교”, “반성”, “추상”이라는 우리 사고의 “논리적 활동”(같은 곳)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논리적 활동”이라는 표현에서 사고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칸트 특유의 사유가 드러난다). 즉 우리는 가문비나무, 버드나무, 보리수나무와 같은 개별자로서의 나무들ㅡ칸트식으로 말하면,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몇몇 감성적 직관들ㅡ을 보고는 이것들을 서로 “비교”하고 이것들의 공통성이 무엇인지 곰곰이 “반성”한 후 이 공통성과 무관한 것들을 “추상”(혹은 도외시)하는 방식으로 ‘나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칸트는 개별 표상인 직관과 보편 표상인 개념을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칸트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주장은 한편으로 직관과 개념을 연속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라이프니츠에 대한 비판을 겨냥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변항’argument과 ‘함수’function에 대한 프레게의 구별을 선취한다. 칸트는 직관과 개념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자신의 큰 성취로 간주한 바 있다.

 

개념형성과정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 이 과정은 원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맥락 안으로 들어가는 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그것은 경험적,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빠져나와 개념들로 구성된 관념적, 추상적인 질서로 옮겨가는 일이다. 이 과정의 출발점은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경험적 질서이고, 그 도착지점은 이 맥락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개념적 질서이다. 이 질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애초 우리가 몸담고 있던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일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 이동을, 이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배제되고 도외시된다는 의미에서, 나아가 애초의 맥락에서 분리된다는 의미에서 “추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추상'의 원어인Abstraktion이 ab[s](=far, from, away) + tract(=pull, draw)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애초부터 분리 내지 도외시를 의미한다).*

 

상품교환과정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교환에 참여할 때 우리는 상품의 사용가치에 관심을 갖지만, 교환과정에서 우리의 관심은 교환가치로 이동한다. 이러한 이동은 애초의 질서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한다. 즉 교환과정에서 상품의 구체적 성질들인 사용가치로부터의 추상 내지 분리가 일어나며, 행위자들은 이 구체적 맥락에서 분리되어 이제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교환가치의 맥락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지금의 추상은 개념 도출을 위해 우리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적 추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현실적 추상’이다(하인리히, <새로운 자본 읽기>, 73 참조). 즉 추상은 우리의 사고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품교환과정이라는 실제 현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상품교환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추상은 우리를 일상과 다른 세상으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 교회에서 행해지는 의례와 유사하다. 달리 말하면 상품교환은 일종의 자본주의적 의례이며,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물건을 사고팔 때 말하자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맑스는 이를 “추상적 개인의 기독교적 제의祭儀das Christentum mit seinem Kultus des abstrakten Menschen”[MEW23, 93, 김수행 역, <자본> 1-상, 100, 번역 수정]라고 표현한 바 있다). 예배를 드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신실한 믿음 없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 날나리 신자라고 하더라도 예배에 참석하면 다른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러야 한다. 설사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더라도 그렇게 하며, 의례가 반복되면 이러한 의례에 익숙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교환을 반복하는 행위자들 역시 유사한 상황에 놓인다. 평소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품교환에 참여할 때 교환가치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며, 상품교환을 반복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질서를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게 된다. 

 

이렇듯 교환의 반복적 수행은 우리의 앎과 행위를 분리시킨다. 상품교환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행동한다. 이를 맑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들은 알지 못한 채 행동한다.”(MEW23, 88, 김수행 역,  <자본> 1-상, 93-4) 혹은, “... 상품소유자들은 파우스트처럼 생각한다. 애초에 행해진 것이 있었다In Anfang was die Tat. 그들은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행위하고 있었다.”(MEW23, 101, 김수행 역,  <자본> 1-상, 109, 번역 일부 수정) 달리 말하면, 우리는 표면적인 앎과 구별되는 어떤 내면화된 앎, 의례에 구현되어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어떤 심층적인 앎에 따라 자동적으로ㅡ프로이트-라깡의 정신분석적 언어로 말하면 ‘무의식적으로’ㅡ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생각을 하느냐보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지내느냐ㅡ어떤 물에서 노느냐!ㅡ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훨씬 중요하며, 모임에서 중요한 것은 의견의 일치나 신념의 통일보다 지속적 만남 자체ㅡ사이가 좋든 나쁘든ㅡ인 법이다.) 자본주의적 질서는 이처럼 우리들 각자가 갖고 살아가는 생각과 무관하게 일상적 의례에 따라 수행적으로 재생산되며, 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이러한 “일상생활의 종교”(김수행, <자본> 3-하, 1010, 번역 수정) 안에서 자본주의적 인간은 탄생한다. 

 

"그들은 알지 못한 채 행동하고 있다Sie wissen das nicht, aber sie tun es"라는 맑스의 말은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라는 성경의 구절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다룬 지젝의 저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의 제목도 이 구절에서 빌려온 것이다.

 

 

 

*직관과 개념에 대한 칸트의 분리를 급진화하는 방식으로 이 분리의 의의를 강조한 이가 헤겔이다. 헤겔에게 철학은 표상Vorstelln에서 개념[적 사고]Begreifen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여기서 표상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들의 보편적 연관을 맺고자 할 때 우리 내면에 만들어지는 심적 이미지를 말한다. 헤겔은 이를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은 표상의 계기 내지 요소들이 체계적 상호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란히 놓여 있을 뿐임을 강조한다. 표상에서 우연적 요소들이 제거되고 대상의 본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계기들의 체계적 연관이 만들어질 때, 표상은 개념으로 이행한다. 이 이행을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는 일, 이 질서와 단절하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필수적이며, 이를 헤겔은 '추상'이라고 부른다.
  추상의 결과로 개념은 일상적인 경험적 질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질서를 갖게 되며, 표상과도 대립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적 직관에 반하는 헤겔 고유의 주장은 개념이야말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 ‘구체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개념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맥락과 분리되어 있지만, 단지 분리되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니라 고유의 방식으로 현실과의 일치를 이루는 방식으로 현실로 복귀하며, 그런 의미에서 개념은 '구체적 보편'이다. 그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ㅡ심지어 맑스조차!ㅡ이 오해한 것과는 달리, 그에게 개념적 질서가 현실과 무관하게 현실 바깥에서 도입되는 어떤 외적 도식이 아니라 애초에 경험적 질서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특히, 맑스의 오해는 이후 좌파 지성사에서 벌어진 헤겔에 대한 비생산적인 대립이라는 불행한 역사의 씨앗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