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의 춤], 김초엽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의 두번째 작품이다.
무엇보다 재밌다. 그리고 생각거리도 많았다. 줄거리와 별개로 이 단편을 중심과 주변, 그리고 경계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그것도 철학이나 미학에서 다루는 '아름다움'을 실마리 삼아....우선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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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화자는 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이름은 최소라이다. 우연히 대학 동기로부터 모그(*시신경 이상을 겪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 인구의 5%)에 속하는 사촌동생 마리를 소개받는다.
시각 장애인이 춤을 배운다? 선생 또한 의아해 한다. 하지만 마리의 춤에 대한 열정을 보고 스승이 되기로 한다. 마리는 시각 장애인이기 때문에 춤을 배우는 방식도 다르고 춤의 내용도 다르다. 하지만 마리는 열심히 춤을 배웠고, 마침내 정상(?)인 사람들 앞에서 공연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연은 마리가 테러를 위해 꾸민 계획의 일부였다. 모그들은 감각 보조장치인 '플루이드'를 사용하는데, 이 장치를 통해 모그들은 동시에 소통할 수 있다. 마리는 이들과 소통을 통해 춤 공연에서 시신경 장애를 일으키는 물질을 무대 효과처럼 분사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테러로 인해 모그처럼 장애를 겪게 된다.
마리는 우리들에게 장애를 주고 떠난 테러리스트로 기억되고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잠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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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이와 같다. 그런데 생각할 거리가 참으로 많다.
철학적 사유를 담아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오랜 SF소설 전통.
나는 이 짧은 단편에서 춤과 관련한 '아름다움'에 대한 부분이 자크 데리다의 '파레르곤' 개념과 연결되며, 작가는 이 단편에서 '아름다움' 개념에 대한 해체(혹은 재구성)를 시도하고 있다 보았다.
주인공 마리는 모그이기 때문에 정상인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마리는 항상 어떤 대상을 볼 때, 대상 '자체'가 아니라 '주변'을 본다.
"마리는 나름 보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내가 아닌 내 주위의 풍경,
나를 둘러싼 공기,
혹은 나의 테두리를 보는 것 같았다."(P.66)
마리는 시각장애인이기에 애초부터 사물의 중심, 혹은 사물 자체, 혹은 대상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진 존재다. 사물의 주변 혹은 테두리만 볼 뿐이고, (사회에서 통용되는) '아름다움'은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저는 어차피 보여지는 아름다움 같은 건 모르니까요."(P.66)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지하고 다르게 세계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마리 혹은 모그들이 느끼고 체험한 아름다움은 이 세계에 수용될 수 없다. 그러나 마리는 포기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한다.
그런데 '주변'을, '테두리'만을 보는데 아름다움을 어떻게 알 수 있고 표현할까? 아름다움은 주변이 아니라 테두리가 아니라 중심, 즉 작품 그자체로 부터 발생하는 것 아닐까?
[모나리자]라는 작품을 보자.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아름다움'이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한다면, 당연히 액자 안에 담긴 작품(중심, 내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그런가? 자크 데리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데리다가 1978년에 쓴 『회화 속의 진리』에는 파레르곤(parergon)이라는 낯선 개념이 등장한다. 파레르곤의 뜻은 예술 작품의 부수적인 것, 주변적인 것을 뜻하는데, 주변을 뜻하는 '파라(para)'와 중심 혹은 기능 혹은 작품을 뜻하는 '에르곤(ergon)'의 합성어다. 데리다는 파레르곤을 "작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품 바깥도 아니고,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것, 하지만 작품을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가령 [모나리자]라는 회화 작품의 경우, 액자가 파레르곤이다. 액자는 작품의 일부이자 동시에 외부다. 현실과 예술 작품을 나누는 경계이고, 이 경계를 시작으로 작품은 비로소 감상자에게 '아름다움'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액자를 경계로 하여 작품 아닌 것이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라는 사건은 파레르곤에서 시작해서 끝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뒤샹의 [샘]을 떠올려보자.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소변기 자체에서 발생하는가?
그럴 리 없다. 소변기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지 않다. 소변기는 현실에도 널려있으며, 예술작품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평범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미'적 체험 혹은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왜일까? 그것이 예술작품이 전시되는 미술관에 있기 때문은 아닌가? 감상자와 작품의 경계에서, 전시물을 감싼 유리벽에서, 전시물일 올려진 테이블에서 '아름다움'은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데리다가 '파레르곤'을 통해 강조했던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일 터.
다시 [마리의 춤]으로 돌아가보자.
마리가 추는 춤은 굉장히 이질적이다. 마리는 선생이 보여주는 춤을 그대로 볼 수 없다. 애초에 구체적 형상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으며, 플루이드가 전해주는 공간 묘사가 아니면, 모든 춤 동작은 단지 허공을 가로질러가는 형체의 이동만 보인다. 형태가 아닌, 중심이 아닌, 주위를! 그리고 공기를! 즉 테두리를!
때문에 마리의 춤은 우리 일반인이 추는 춤과 다르며, 따라서 낯설다. 하지만 이 낯선 춤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새로운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선생 또한 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는 마리가 보여주는 낯선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이 좋았다.
그 세계는 내가 알지 못했던 목소리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새로운 감각에 목말라 있었다."(P. 85)
물론 마리가 설명하는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마리는 테러가 벌어졌던 무대에서 정말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 춤을 보았던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마치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듯 보였다고 한다. 선생은 마리와의 인연, 추억을 떠올리며 빛을 생각한다. 그러며 이렇게 독백한다.
빛은 얼마나 상대적인 것일까?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던지면서 [마리의 춤]은 끝을 맺는다.
"아름다움은 표면 아래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P.98)
왜일까?
표면 아래에 머물러 있는 아름다움, 침잠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정상인의 세계의 아름다움은 마리의 테러 이후에 표면 아래로 깊이 잠겼던 것다. 이제 보여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러면 남은 것은 바깥에서 중심으로 밀고 들어오는 외부 혹은 마리의 춤 속에 담긴 것, 즉 새로운 '아름다움'의 발생 사건이다.
선생은 마리가 남긴 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목소리를 듣는다. 어느 하나도 결코 같지 않던 목소리들. 즉 이질적인 목소리들, 다름의 목소리들. 바로 존재의 함성을!
[마리의 춤]이라는 김초엽의 단편에는 주류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소외된 존재들의 목소리와 함성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아니 '아름다움'이 발생하는 사건으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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