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이전 글들 44

운명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군중들은 바스티유로 몰려갔고 3년 뒤 프랑스는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몇 달 뒤 루이 16세는 처형되었고, 무명의 포병 장교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독재자에 이르는 출세 가도를 걷기 시작하였다. 1792년 조지 워싱턴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었고, 괴테는 바이마르에서 공작의 극장을 감독하면서 광학에 관한 연구내용을 출판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그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모짜르트의 몸은 빈 공동묘지의 빈민묘역에 비명도 없이 누워 있었다. 1792년 11월 초 22세가 채 못 된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란 이름을 가진 야심적인 젊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가 라인 강에 있는 본에서 빈으로 승합마차로 1주일 걸리는 500마일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베토벤은 새롭고 강력한 힘이 인간사회에 팽..

인사를 대신하며...

야구를 좋아합니다. 제가 응원하는 팀이 요 몇 년간 가을잔치에 나가지 못해 우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즐겨보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야구라는 운동을 접했을 때, 이상했던 것 중에 하나가 타자 타율이 3할만 되면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거였습니다. 소위 프로선수라는 사람들이, 억대 연봉을 받는 톱타자들조차도 3할만 치면 그 해 타율은 좋았다는 얘기를 하는 걸 보면서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10번 타석에 서서 달랑 3번의 안타를 친다는게 뭐 그리 대수인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조금씩 야구에 대해 알게 되고, 가령 투수가 던진 공이 타자에게 0.4초만에 도달하며 그 공을 타자는 0.2초만에 반응해서 때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3할이라는 타율이 결코 쉽지 않은 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고..

표준 우주론이 말하는 우주의 역사

우주론 이야기 좀 하자 빅뱅 어쩌구부터 시작하진 않겠다. 완결된 상태의 과학적 설명을 듣기보다는 어떻게 그 이론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유익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우주론에 대해서 뒤비져 주겠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S 모님을 위한 글이므로 아주 쉽고 천박한 수준에서, 하지만 비교적 정확한 설명을 제기하도록 하겠다. 1. 과학적 우주론 이전 뭣도 모르고 상상에 공상에 사변을 거듭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때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도록 한다. 이 때 우주론 중에서 가장 그럴 듯한 것은 지구 아래에는 그 지구를 떠받들고 있는 거북이 있고, 그 아래에는 또 그 거북을 떠받들고 있는 거북이 있고, 그 아래에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무한 거북론”이다. 근사하지 않은가. 상상력을 발휘하려면 이..

볕도 안 드는 뿌연 개천에서 살아가기

개천에서 용나지 않는 시대에 고함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정대진 (책마루, 2009년) 상세보기 * 본 글은 초안이며 보다 자세한 내용은 위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막힌 물길 중학교 3학년, 이재민의 경우/ 꿈은 꿈일 뿐이다 / 함께 꾸는 꿈도 현실이 되지 않는다 / 계속 꿈만 꾸어야 하는가 / 다른 꿈을 꿀 수는 없을까 / 다른 꿈도 못 꿀 수 있다 / 볕도 안 드는 뿌연 개천에서 살아가기 / 통계로 보는 볕 안 드는 개천 바닥 / 오늘날의 개천은 강과 바다로 닿지 않는다 / 강과 바다에 사는 아이들은 행복할까 개천에서도 용은 났으나 개천에서도 용은 났으나 / 다이너마이트에 불장난하는 대한민국? / 억울하면 출세해라, 왕조의 몰락과 식민지배/ 억울하면 출세해라, 정부수립과 고착된 기회주의 / 억..

꿈은 꿈일 뿐이다

개천에서 용나지 않는 시대에 고함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정대진 (책마루, 2009년) 상세보기 * 본 글은 초안이며 보다 자세한 내용은 위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개천에서 나는 용들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입니다. 부의 격차가 교육격차를 통해 대물림되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만 오늘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올 이무기들의 용트림을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육 양극화가 계속되고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시대"로 굳어진다면 우리 십대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살아갈 미래사회는 양극화로 인한 불안과 갈등이 팽배한 세상이 될 게 분명해 보입니다. 아무런 방어도, 아무런 주장도 하지 못한 채 십대들은 어두운 미래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 미래를 바꾸는 일을 생각..

소액금융의 성공가능성(1)

전통적으로 금융시장은 다른 시장에 비해서 정보비대칭성이 높아 시장실패의 가능성이 아주 높지요. 즉 금융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사회적 자본의 효율적 배분이 어렵다는 겁니다. 당연히 금융기관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신용할당과 같은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회적 약자, 즉 자금수요는 많으나 담보를 제공할 수 없는 빈곤층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시장에서 소외받는 사회적 취약계층의 빈곤탈출을 위해 전통적 금융기관과 상이한 방식으로 소액대출 등 다양한 지원을 하는 특수한 형태의 대안적 금융을 소액금융(microfinance)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악화되는 소득불균형과 의료민영화 등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사회보장의 확대 필요성에 대한 주장들… 그리..

확률 : 자연에서 마음으로

떡밥은 그냥 놔둔 채로 (언젠간 다시 다룰 테니까) 다른 확률 이야기를 해 보자. 통계학 및 확률론에서 "큰 수의 법칙"이라는 개념을 다룬다. 아무리 작은 확률을 가지는 사건이어도 시행 횟수가 엄청나게 많아지다보면 반드시 일어난다는 법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수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식으로 이 통찰을 (비수학적인 방식으로) 간파한 적이 있다. 주사위를 연속으로 10번 던져 1이 연속으로 10번 나오는 확률은 얼마일까? 매번 던지는 행위는 앞이나 뒤의 사건과는 인과관계가 없으므로 1 / (6^10)의 확률이다. 그런데 사실 이 확률은 1,3,4,2,1,5,6,3,2,5의 눈이 순서대로 나올 확률과 똑같고 6,5,4,3,2,1,2,3,4,5의 눈이 순서대로 나올 확률과 다르지 않다. 일단 ..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범죄소설-<아웃> 기리노 나쓰오, <미스틱 리버> 데니스 루헤인

에르네스트 만델이 탁월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범죄소설은 자본주의 사회의 충실한 반영이다. 범죄와 살인은 곧 사유재산과 그 주체인 개인에 대한 공격이며, 범죄소설이 이를 어떻게 다루는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직설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범죄소설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균열과 위기는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봉합되는가, 다시, 사회는 모든 개인에게 안전한 어떤 것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인가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고전 미스테리의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다시금 통합되어 문제없이 작동하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괴한 살인사건이라도 반드시 해결되고야 만다. 범죄와 살인은 한정된 사람들 사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현실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인공적인 퍼즐-수수께끼가 사건의 ..

한 마리 참새가 말하기를, 누가 울새cock robin를 죽였나....동요살인의 매력, 하지만 바로 그게 말이야.

, 요코미조 세이시//정명원 옮김, 시공사. 2007. 7월 (생각난 김에, (S.S.반다인/김성종 옮김(그 김성종!), 동서문화사, 2003. 1. 동서문화사판 추리문고의 초판은 1977년이다.) 구전되어오는 노래의 내용에 따라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아이디어는 꽤나 흥미롭다. 그런만큼 수많은 미스터리에서 노래에 맞춰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잘 활용해왔다. 이를테면 마더 구즈의 노래를 테마로 살인사건이 짜이고 풀려가는 걸작 미스터리들이 즐비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잊을 수 없는 , 이나, 같은 작품들이 있고, 엘러리 퀸 역시 이를 종종 활용했다(). 아마도 이 계열에 첫 손 꼽힐 작품은 반 다인의 일 텐데, 동요살인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대표하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란 것은..

그는 아마도, 꼭,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은 아닐거야 -히가시노 게이고 <범인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윤성원 옮김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9. 4.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소설 7편을 묶은 단편집. 원래 1994년에 나온 책이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범인 혹은 범인의 동기에는 일종의 센티멘탈이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7편의 단편들은 그런 경향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소설들은 조금씩 그 색깔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범인의 '의도'와 관련해서 읽을 수 있다. 범인의 의도란 건 결국 범죄의 동기에 관한 것이다. 범죄 자체보다 범인에 대해, 특히 그가 왜 살인을 하게 되었는가, 뭐 이런 것에 관련이 되는 것이다. 우아하게 말해서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고 해둘 수 있을 것이지만, 사실, 그러기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주인공들은 너무 통속적이어서 별달리 인간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