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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범죄소설-<아웃> 기리노 나쓰오, <미스틱 리버> 데니스 루헤인

에르네스트 만델이 탁월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범죄소설은 자본주의 사회의 충실한 반영이다. 범죄와 살인은 곧 사유재산과 그 주체인 개인에 대한 공격이며, 범죄소설이 이를 어떻게 다루는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직설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범죄소설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균열과 위기는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봉합되는가, 다시, 사회는 모든 개인에게 안전한 어떤 것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인가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고전 미스테리의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다시금 통합되어 문제없이 작동하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괴한 살인사건이라도 반드시 해결되고야 만다. 범죄와 살인은 한정된 사람들 사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현실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인공적인 퍼즐-수수께끼가 사건의 ..

자유, 필연성, 헤겔 (1)

1.한때 옛 소련에서 나온 철학교과서들이 유행하던 시기, 자주 듣던 이야기 중에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에 이 말은 역사의 합법칙적 필연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었는데, 말하자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굴러가게 돼 있으며, 이와 같은 역사의 객관적 필연성을 이해할 때 인간은 자유로와진다, 정도의 뜻으로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했다. 즉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역사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역사의 법칙은 굴레나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어릴 때 소설책에서 본 후 나에게 인상깊게 남아있었던, "운명은 순응..

한 마리 참새가 말하기를, 누가 울새cock robin를 죽였나....동요살인의 매력, 하지만 바로 그게 말이야.

, 요코미조 세이시//정명원 옮김, 시공사. 2007. 7월 (생각난 김에, (S.S.반다인/김성종 옮김(그 김성종!), 동서문화사, 2003. 1. 동서문화사판 추리문고의 초판은 1977년이다.) 구전되어오는 노래의 내용에 따라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아이디어는 꽤나 흥미롭다. 그런만큼 수많은 미스터리에서 노래에 맞춰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잘 활용해왔다. 이를테면 마더 구즈의 노래를 테마로 살인사건이 짜이고 풀려가는 걸작 미스터리들이 즐비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잊을 수 없는 , 이나, 같은 작품들이 있고, 엘러리 퀸 역시 이를 종종 활용했다(). 아마도 이 계열에 첫 손 꼽힐 작품은 반 다인의 일 텐데, 동요살인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대표하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란 것은..

그는 아마도, 꼭,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은 아닐거야 -히가시노 게이고 <범인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윤성원 옮김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9. 4.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소설 7편을 묶은 단편집. 원래 1994년에 나온 책이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범인 혹은 범인의 동기에는 일종의 센티멘탈이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7편의 단편들은 그런 경향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소설들은 조금씩 그 색깔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범인의 '의도'와 관련해서 읽을 수 있다. 범인의 의도란 건 결국 범죄의 동기에 관한 것이다. 범죄 자체보다 범인에 대해, 특히 그가 왜 살인을 하게 되었는가, 뭐 이런 것에 관련이 되는 것이다. 우아하게 말해서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고 해둘 수 있을 것이지만, 사실, 그러기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주인공들은 너무 통속적이어서 별달리 인간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많..

김훈과 대한민국 우파가 살아가는 법

1.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파는, 누가 뭐래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왔다고 할 때,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빨갱이들"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손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왔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들의 이러한 자부심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자부심만큼의 권리가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것에는 이들의 이만큼의 기여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이러한 그들의 기여가 다른 모든 것들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국가를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반정부 민주화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

욕망의 단상 2009.06.08

태초부터 있었던 것들, 살인 그리고 수수께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지금도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해문출판사의 빨간색 표지를 단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문고로 날밤을 꼬박 샌 것이 대체 며칠이었던가. 지금껏 인류가 살아오며 말하고 전하고 쓰고 남긴 많은 것들을 읽고 또 거기에 몇 장을 보태는 사소한 삶을 살고자 한다만, 그 모든 활자들 중에서 단연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칼자국에 피범벅이 된 시체거나, 얌전히 고개를 떨군 독살시체거나, 신원을 알수 없이 얼굴이 뭉개진 시체거나, 불에 태워진 시체거나, 토막 난 시체거나, 무언가 둔탁한 것에 얻어 맞아 쓰러져 있는 시체거나, 선명한 줄의 자욱을 목에 남긴 교살시체거나 등등의 시체들 이야기이다. 나는 네크로필리아가 아니므로 좋아하는 것은 '시체들'이 아니라 시체들의 '이야기'이다. ..

확률의 수수께끼 - 반감기 : 우연으로부터 필연으로?

(이 글은 맑은고딕 폰트를 사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글은 뒤에 써야겠지만 일단 머리를 팽팽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한 가지 사례를 떡밥으로 던져 놓고 시작해 보자. 20세기 물리학의 발달로 우리는 방사성 원소들이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 붕괴한다는 사실, 즉 핵분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과학사에 대해 조금의 상식이라도 있다면 익히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리제 마이트너라는 걸출한 여성 과학자가 이 핵분열의 원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의 공적으로만 기억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해 보자. 아무튼 양성자 92개로 이루어져서 원소 번호가 92인 우라늄은 자연상태에서 발견되는 원소 중 가장 무거운 원소이다 (그래서 열화우라늄탄은 "저열한" 상태의, ..

확률 개념의 철학적 이해 - 간단한 소개

(이 글은 맑은고딕 폰트를 사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도상학의 관행에서 여신 사피엔티아Sapientia는 포르투나Fortuna와 짝을 이뤘다. 앎은 필연적인 원인에 대한 것이며, 우연은 이 필연적인 원인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연과 앎은 서로를 부정하는 관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을 보면 이 제멋대로이고 어떤 필연적인 원인을 갖지 않는, 우연(티케Tyche)이 지배하는 운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왜 위대한 아가멤논의 가문은 끔찍한 파멸을 당해야 했는가. 아이스퀼로스의 는 이 운명이라는 혼돈의 세계에 필연성이라는 아폴론의 빛을 비추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아가멤논은 오만함(휘브리스hybris)의 죄를 지은 탄탈로스의 자..

Wandern에 대하여

Wandern은 제가 좋아하는 독일어 단어 중 하나입니다.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행(특히, 도보여행)이나 방랑, 혹은 유랑 등의 뜻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뜻 말고도, 이 단어는 편력(遍歷)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력이란 흔히 이곳 저곳을 두루 돌아다니거나 여러가지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하지요. 오늘날에는 다른 데서는 잘 쓰이지 않고 남자가 여자 경험이 많을 때, (혹은 여자가 남자 경험이 많은 경우에) "그 xx, 여/(남)성편력이 되게 심해"라고 말하는 데 주로 쓰이지요.ㅋ (이런 의미로 쓰인 경우로, 박노해의 "남성편력기"라는 시가 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건전한' 남성편력을 다룬 시입니다.ㅋ 오늘날의 시대적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시이긴 합니다만, 혹시 읽어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