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지금도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해문출판사의 빨간색 표지를 단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문고로 날밤을 꼬박 샌 것이 대체 며칠이었던가. 지금껏 인류가 살아오며 말하고 전하고 쓰고 남긴 많은 것들을 읽고 또 거기에 몇 장을 보태는 사소한 삶을 살고자 한다만, 그 모든 활자들 중에서 단연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칼자국에 피범벅이 된 시체거나, 얌전히 고개를 떨군 독살시체거나, 신원을 알수 없이 얼굴이 뭉개진 시체거나, 불에 태워진 시체거나, 토막 난 시체거나, 무언가 둔탁한 것에 얻어 맞아 쓰러져 있는 시체거나, 선명한 줄의 자욱을 목에 남긴 교살시체거나 등등의 시체들 이야기이다.

나는 네크로필리아가 아니므로 좋아하는 것은 '시체들'이 아니라 시체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시체 '이야기'를 즐기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세계의 무지 많은 나라들에서 채 상상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추리소설을 읽고, 굉장히 많은 작가들이 추리소설을 잘 만들어서 억만장자가 되었다.(이를테면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처럼, 게다가 소설로만 끝나지도 않는다)    


(나를 비롯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범죄와 살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범죄와 살인의 그 기막힌 이야기들은 왜 그토록 재미있을까. 

모두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살인자들이 있다. (어쩌면 신의 뜻에 따라) 최초의 살인을 했던 카인도 있고, 동생과 공모해 어머니와 그 정부를 살해한 엘렉트라도 있으며,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를 목졸라 죽인 오델로에(혹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맥베드 부부이거나 고뇌하는 살인자 햄릿, 셰익스피어의 주요 작품에 예외없이 살인이 등장한다는 점이야말로 기억할만하다) 제 손으로 정의를 만들고자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도 있다. 살인, 그리고 범죄 그 자체라고 한다면, 인간이 땅에 발을 딛고 선 그 때부터 바로 이 순간까지 한시도 인간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정색하고 말해본다면 범죄(와 살인)은 인간 삶의 어떤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것을 극화한다.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선과 악, 죄와 벌, 사랑과 증오, 인정과 배제, 지배와 복종의 모든 것이 그 곳에서 만난다. 그러나 내가 흥미를 가지는 것은 그토록 의미있는 인간의 면면이 아니다. 이 모든 기억해야만 하는 살인자들은 추리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과 추리소설의 살인자들은 닮은 듯 하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추리소설속에 등장하는 범죄와 살인은 이전의 위대한 비극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살인자들은 어떻든지간에 영웅이 아니며, 살인의 전후 맥락, 동기보다 살인 그 자체가 더 중요해진다. 추리소설속의 살인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점증하는 범죄와 살인의 자극은 읽는 이의 불안과 공포를 높여가지만, 동시에 이야기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든다. 되돌아볼 순간을 한 순간도 허락하지 않고 끝까지 몰두해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추리소설속의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공포는, 읽는 이의 개인적인 운명과 철저히 무관한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지는 불안 혹은 공포와 이야기가 그대로 맞닿는 순간, 책장을 넘기는 행위는 고통스러운 고문으로 바뀌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차라리 카프카를 읽는 것이 훨씬 나을 정도로)



그런 점에서 추리소설이야말로 근대사회가 이전의 사회와 어떻게 다른지를 증거해주는 한 실례이다. 추리소설은 범죄와 살인에 순수하게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근본적인 삶의 불안과 공포를 억제해 줄 수 있는 시대를 증거한다. 범죄와 살인의 극적인 경험이 오지의 모험가 혹은 운명을 바꾸기 위해 떠난 영웅이거나 특별한 야심가의 것이 아니라 날마다의 일상적 삶에서 부딪치게 되는 시대에, 하루하루의 삶에서 살아남는 것이 지극히 불안한 시대에 추리소설은 근본적인 공포를 잠시 망각하고 불안에서 벗어나는 기분전환의 오락이 된다.




에드가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은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추리로 살인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최초의 추리소설로 일컬어진다. (물론, 뒤팽의 논리정연한 추론의 결과가 살인자 오랑우탄으로 귀결된다는 점은 조금 괴기스럽기는 하지만.)'도둑맞은 편지(1845) 에서 명쾌하게 드러나듯이, 오귀스트 뒤팽이야말로, 역사상 이어지는 위대한 탐정들의 시조로 손색이 없다. 뒤팽의 가장 위대한 후계자는 아마도, 셜록 홈즈일텐데, 1886년, 코난도일이 등장시킨 셜록 홈즈를 통해 추리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뒤팽과 홈즈라는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가겠지만, 초기의 추리소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수께끼 풀이였다. 범죄와 살인은 꽉 짜인 퍼즐 풀이를 위한 배경을 제공할 뿐이다. 완벽하게 분석적인 사고를 통해 조립하고 분해할 수 있는 퍼즐이야말로 추리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이다. (수수께끼의 풀이는 물론 인간의 본질이다. 따지고 보면
문명이라는 것이 인류가 인간자신과 자연의 수수께끼에 도전해 풀이해 온 역사가 아니던가.수수께끼는 그런 점에서 인간의 운명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기도 하다. 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풀이로 시작했듯이.아시다시피, 추리소설의 수수께끼는 반드시 풀리고야 만다는 점에서 다른 수수께끼, 예컨대, 카프카의 케이가 맞닥뜨리는 수수께끼와 다르다.)




추리소설은, 그야말로, 사람보다 사물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증거한다. 단서는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절차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완벽하게 재구성한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사물들이다. 오히려 사람의 이야기는 변덕스럽고, 부정확하며,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는데 장애가 될 뿐이며. 잘해봐야 사물과 같은 선상에 놓인다.(사건의 해결에 목격자의 증언은 시체가 보여주는 단서이거나 흉기가 보여주는 단서보다 나을 것이 없다.)
 
공포와 불안에 가득한 일상, 온통 불확실성에 내맡겨진 삶의 조건,  눈앞에서 확인되는 계급 간의 치열한 전쟁을 매일 치루어 내는 근대사회에서 살인과 범죄 자체의 풀이에 순수하게 집중하는 것은  근대의 어쩔 수 없는 혼란과 무질서를 구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소설은 오직 근대 이후에 가능한 이야기이며 근대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는 탐침이 된다. 

어찌되었든 간에 훌륭한 추리소설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그래서 아마도 나는 여전히 밤을 새는 날들이 많을 것이다. 다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생각나는대로 발견한 사람과 사회에 대한 짤막한 단상들을 두서없이 이곳에 적어가기도 할 텐데 (게으름을 어떻게 이기고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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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글은 뒤에 써야겠지만 일단 머리를 팽팽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한 가지 사례를 떡밥으로 던져 놓고 시작해 보자.

20세기 물리학의 발달로 우리는 방사성 원소들이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 붕괴한다는 사실, 즉 핵분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과학사에 대해 조금의 상식이라도 있다면 익히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리제 마이트너라는 걸출한 여성 과학자가 이 핵분열의 원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의 공적으로만 기억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해 보자.

아무튼 양성자 92개로 이루어져서 원소 번호가 92인 우라늄은 자연상태에서 발견되는 원소 중 가장 무거운 원소이다 (그래서 열화우라늄탄은 "저열한" 상태의, 그러니까 순도가 낮은 우라늄을 탄두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뜻이고, 그 이유는 우라늄이 무겁고 단단한 금속이기 때문이다. 강철 따위는 가볍게 뚫는다). 보틍 핵무기 얘기가 나올 때 듣게 되는 플루토늄은 우라늄의 핵 분열(보통은 원자로 가동) 과정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참고로 플루토늄은 원자번호 94). 그리고 자연상태의 우라늄 대부분은 우라늄-238이다(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원자핵에 92개의 양성자와 146개의 중성자가 들어있어서 질량비가 대체로 수소 원자의 238배 정도가 된다는 뜻이고, 이런 표기는 양성자의 개수는 같지만 중성자의 개수가 틀린 동위원소를 표시하기 위한 표준적인 방법이다). 

먼저, 우라늄-238의 반감기는 약 44억년이다. 다시 말해, 지구가 처음 생겨났을 때 지구에 있던 우라늄은 (생성 초기의 고온 고압 상태를 무시한다면) 지금보다 두 배 가까웠다는 이야기다.  더 쉽게 생각해 보자. 여기에 1킬로그램짜리 우라늄 막대를 갖고 있다고 하자. 44억 6천만년이 지나면 그 막대에는 500그램의 우라늄만이 남아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라늄 원자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반감기, 즉 붕괴할 확률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44억 6천만년 후에 그 원자핵 하나가 붕괴했을 가능성은 반반이다.

하지만 다시 44억 6천만년을 더 기다린다면?

원자핵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므로, 똑같은 확률이 지배한다. 다시 44억 6천만년을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역시 그 원자핵 하나가 붕괴할 확률은 50%이다.

이거 재밌지 않나? 매 반감기 주기당 특정한 원자핵이 붕괴할 확률은 항상 50%이다. 그러므로 운 좋은 원자핵 하나를 찾으면 우리는 우주 끝날 때까지 수조년 동안 붕괴하지 않는 녀석 하나를 볼 지도 모른다. 그게 설령 우주에 마지막 남은 우라늄 원자핵 하나라고 할 지라도, 매 44억 6천만 년마다 이 원자핵이 붕괴할 확률은 반반이다. 동전을 던져 앞, 앞, 앞, 앞, 앞, 앞, 앞, 앞이 연속으로 나오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이 반반의 확률을 계속 빗겨나가며 마지막 우라늄 원자핵으로서 수백억 년 쯤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여러분은 지금 100억 번째 반감기를 지나도록 붕괴하지 않는 우주 유일의 우라늄 원자핵을 보고 계십... 앗 지금 붕괴를?"

이 때 우라늄 원자핵의 자연 상태의 핵분열이 통계적 사건이라는 건, 반감기라는 통계적인 확률이 "필연적으로 관철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우라늄 1킬로그램 쯤 되면 엄청난 양의 원자핵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전체를 놓고 볼 때 반감기가 지켜지지 않을 확률이 극도로 낮을 뿐이다.

예를 들어, 전 우주의 우라늄을 여기 다 모아놓고 44억 6천만년을 지켜보면 정확히 절반이 붕괴했을 확률은 극도로 높고 그 중 45%만 붕괴하고 55%가 남아있을 확률은 극히 낮다. 그러나 우라늄 원자핵 100개를 놓고 본다면, 44억 6천만년 후에 정확히 50개가 아니라 49개라든가 51개의 우라늄 원자핵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꽤 높게 된다.

무슨 이야기냐. 전 우주에 우라늄 원자핵 2개만 남고,  그 하나를 내 앞에 두고 다른 하나를 우주 저편으로 보냈다고 한다면, 44억 6천만년 후에 내 앞의 원자핵이 붕괴하지 않는다면 "반감기라는 통계적 확률"을 관철하기 위해 우주 저 편의 원자핵이 반드시 붕괴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주에 우라늄 2킬로그램이 남았을 때, 1킬로그램 씩 나누어 똑같이 분배한 뒤 44억 6천만년이 지나면 어떨까? 내 앞의 우라늄이 미묘하게 1그램 정도 우라늄이 더 남았다면, 저 우주 건너편의 우라늄 1킬로그램에서는 1그램 정도 우라늄이 더 붕괴했을 가능성이 더 높을까 그렇지 않을까?

내가 오늘 던질 떡밥은 바로 이 문제다. 잘 생각해 보라.


이왕 골치 아픈 거 여기서 더 황당한 실험 하나만 언급해 보자.

소립자들 특성 중에서 정말로 "통계적"으로만 나타나는 속성이 있다. 그걸 "뜨거운 - 차가운" 대립 속성 쌍이 50대 50의 확률로 나타나고, "건조한 - 촉촉한"의 쌍이 50 대 50으로 나타난다고 치자.

우리는 검출기를 통해서 "뜨겁고 차가운" 것들을 서로 구별해낼 수가 있고, "건조한 - 촉촉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전자의 검출기를 A라고 하고 후자의 검출기를 B라고 하자.

자 이제 2000개의 소립자(전자와 같은)를 A 검출기를 통과시켜 "뜨거운" 입자만 걸러낸 뒤 이것을 B 검출기에 다시 넣어 "촉촉한" 것만 골라냈다고 해보자. 우리는 이제 500개의 "뜨겁고 촉촉한" 입자를 갖고 있는 셈이다. 다시 이것을 A 검출기에 통과시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A 검출기를 통과한 소립자는 "뜨거운" 입자가 250개, "차가운" 입자가 250개로 나타난다.

이런 실험이 의미하는 것은 "측정-관찰" 이전에 어떤 고정된 속성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놀라운 결론이었다.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자연은 원래 그따위로 생겨먹은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물리적 확률로서의 chance를 이해하기 위해 양자역학이라는 가슴아프도록 황당한 세계를 통과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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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도상학의 관행에서 여신 사피엔티아Sapientia는 포르투나Fortuna와 짝을 이뤘다. 앎은 필연적인 원인에 대한 것이며, 우연은 이 필연적인 원인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연과 앎은 서로를 부정하는 관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을 보면 이 제멋대로이고 어떤 필연적인 원인을 갖지 않는, 우연(티케Tyche)이 지배하는 운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왜 위대한 아가멤논의 가문은 끔찍한 파멸을 당해야 했는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는 이 운명이라는 혼돈의 세계에 필연성이라는 아폴론의 빛을 비추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아가멤논은 오만함(휘브리스hybris)의 죄를 지은 탄탈로스의 자손이고 그로 인해서 그 가문은 끔찍한 종말을 맞이 한다. 그리스인들은 개인의 존재를 혈족이라는 더 큰 정체성 속에서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르면서도 삶에 무의미한 운명의 자의적 장난이 없기를 원했던 것이다 (물론 <오레스테이아>는 복수의 여신들과 이 가문의 마지막 자손들을 아테나이 여신의 중재로 화해시킴으로써 모든 것을 이 끝이 없는 복수의 연쇄에 맡기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지만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확률 개념의 탄생이 18세기 중반부터 앎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바꾸어 버린 지성사의 혁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비로소 이 시기에 와서야 앎은 우연과 불확실성을 자신의 영역으로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르다노의 선구적인 업적이 있긴 했지만 중단된 도박의 판돈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 파스칼과 페르마가 나는 편지 교환에서 확률의 수학적 계산이 시작되었고, 이 도박을 이용한 파스칼의 변신론에서 철학적 논의가 비롯되었다고 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어 로크와 라이프니츠 등이 이 확률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확률은 철학적 논의의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도 불구하고 확률 개념은 분명하게 정의되지 못했다. 기대값과 확률이 혼동되었는가 하면, 통계적인 추측의 실용적인 필요성과 철학적 확률 개념이 뒤섞여 "확률의 수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정립되지 못했다. 베르누이 등 많은 수학자들이 확률의 특수한 문제들과 해법 혹은 역설을 제시했지만, 그리고 베이즈의 주관적인 확률 개념과 통계에 바탕을 둔 피셔의 빈도적 개념이 확률론의 발달과 확장에 기여했지만, 확률론이 엄밀한 수학적 기초를 갖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였다. 콜모고로프의 기념비적인 저작에 의해서 비로소 공리적 확률론이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확률의 수학"은 이제 거의 이론의 여지없이 체계를 갖추었지만 여전히 확률 개념은 다의적이다. 확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여러 학파들이 그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 문제는 확률을 어디서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보자.

빈도주의자는 사회적 통계에서 a라는 사건이 가지는 확률이 가지는 값을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동일한 조건이 반복된다면 전체 모집단에서 a가 발생하는 빈도가 일정한 값으로 수렴될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확률의 통계적 의미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독감의 사망율이 3퍼센트라고 한다면, A 지역에서 100명 중 4명이 죽을 수도 있고, B 지역에서 100명 중 1명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표본 집단의 크기를 점점 크게 해 나간다면 독감에 걸린 전체 환자에서 사망하는 환자의 비율은 3%(100분의 3)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그러나 이 빈도주의의 문제점은 "무한한 시행 횟수"를 가정한다는 데 있다. 그에 비해 성향주의자는  하나의 특정한 사건에 대해서도 확률 개념을 유의미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빈도적 해석을 거부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저 특정한 하나의 중성자가 10.8분이 지나면 붕괴할 확률이 50퍼센트라는 단칭 진술을, 자유로운 중성자는 그렇게 붕괴되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주로 확률 개념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에 속한다. 그에 비해 베이즈의 주관적 확률이나 카르납의 논리적 확률은 인식론적인 함의를 가진다. 베이즈 주의자들에 따르면 확률은 주관적인 믿음의 정도이고, 카르납에게 있어서는 확증의 정도이다. 즉 베이즈 주의자들은 "넘버3"의 한석규처럼 "51%만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에, 카르납주의자들은 "여러 증거들이 화성에 생명체가 살았다는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정도는 80% 정도다"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금 내가 약간 암시했던 것처럼, 영역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을 사용하는 다원주의자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확률에 관한 철학적 개론서를 쓴 멜러의 경우 (1) Chance - 물리적 확률 (2) 인식적 확률 - 지지/확증의 정도 (3) 신뢰도 - 주관적 믿음의 정도를 서로 구별하고 있다.

이런 예비적인 구분들을 염두에 둠으로써 양자 역학의 파동 방정식의 해로 나타나는 소립자의 확률적 분포, 의료 통계에서 나타나는 상관 관계의 확률적 해석, 결단 논리에서 사용하는 베이즈 추론의 확률 개념이 서로 같은 수학적 "확률론"에서 나온 공식들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실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고 그렇게 사용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 구체적인 확률 개념의 사례들과 함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라고는 했지만 게을러서 언제 쓸 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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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ern은 제가 좋아하는 독일어 단어 중 하나입니다.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행(특히, 도보여행)이나 방랑, 혹은 유랑 등의 뜻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뜻 말고도, 이 단어는 편력(遍歷)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력이란 흔히 이곳 저곳을 두루 돌아다니거나 여러가지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하지요. 오늘날에는 다른 데서는 잘 쓰이지 않고 남자가 여자 경험이 많을 때, (혹은 여자가 남자 경험이 많은 경우에) "그 xx, 여/(남)성편력이 되게 심해"라고 말하는 데 주로 쓰이지요.ㅋ

(이런 의미로 쓰인 경우로, 박노해의 "남성편력기"라는 시가 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건전한' 남성편력을 다룬 시입니다.ㅋ 오늘날의 시대적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시이긴 합니다만, 혹시 읽어본 적 없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지요.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세에는 도제가 독립적인 장인(마이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련여행을 거쳐야 했고, 이와 같이 수련생이 자기가 배울만한 장인을 찾아다니며 수련여행을 하는 것을 편력이라고 했습니다. 상상력을 좀 가미해서 이야기하면, 어떤 욕심많은 수련생은 어디에 훌륭한 장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곳을 찾아가서 사사를 받고, 또 그 과정이 어느 정도 끝났다 싶으면, 또 다른 장인을 찾아가고.. 장인이 될 때까지 이런 과정을 반복하기도 했겠지요.

Wandern은 이 과정을 가리키는 독일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앞에서의 방랑이나 유랑의 의미로 이야기할 때와는 어감이 상당히 다르지요. "여성편력"을 이야기할 때의 편력과도 많이 다르구요. 정처없이 방황한다는 느낌보다는 확고한 지향성을 가지고 뭔가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강한 듯하고, 또 계속해서 뭔가를 배워나간다는 의미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뜻에서 보면, 도를 깨치기 위해 면벽수도도 하고 도사님도 찾아가는.. 동양적 이미지와도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도 역시 쉽게 깨치기가 힘들어 그것을 깨치기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하는.. 뭐 그런 것으로 생각되지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뒷편으로 쓰여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 편력시대의 원어는 Wandjahre입니다. 위에서 말한 "Wandern"의 의미가 드러난 제목이지요. 흔히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연작을 교양소설이라 부릅니다. 이 교양소설이란 말의 원어는 "Bildungsroman"인데요, 여기서 "교양"에 해당하는 말인 "Bildung" 역시 오늘날의 교양이란 말이 가진 어감 - 예컨대, "그 여자, 참 교양있는 여자야"라고 말할 때와 같은. 근데 이 말은 뭔가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하고 비슷한 것같지 않나요?ㅋㅋ - 과는 달리, 위에서 말한 "Wandern"의 의미와 상당히 통하는 바가 있지요. 헤겔의 책에서도 "Bildung"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용어로 쓰이는데요, 이 말은 교양보다는 "도야"나 "성숙" 혹은 "문화"로 번역하는 게 훨씬 뜻이 잘 통합니다.

(빌헬름 마이스터도 그렇지만, 괴테에게는 이런 모티프가 강하게 드러나지요. 파우스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Es irrt der Mensch, so lang er strebt)"인 것이구요.)

하지만, 제 생각에 이 글의 내용과 보다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가곡 "Wandern"이 있습니다. 이 곡은 슈베르트의 연가곡(連歌曲)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에서 첫 곡으로 쓰인 노래입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는 물방앗간에 취직한 한 청년이 그 집 딸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집 딸은 잘 생긴 사냥꾼을 좋아하는 관계로 실연의 상처를 견디지 못한 이 청년이 자살한다.. 뭐 이런 이야기를 담은 20곡의 연가곡으로 이루어진 작품인데요. 전체 줄거리는 뭐 별게 없지요? 좀 뻔한 이야기구요..ㅋ

암튼 이 연가곡집의 첫 곡으로 만들어진 곡이 바로 "Wandern"입니다. 이 곡은 전체 이야기의 시작으로 편력을 떠나는 주인공 청년이 이 편력에 대해 가진 기대와 희망을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슈베르트의 일반적 이미지와는 달리, 밝고 희망찬 분위기를 가진 노랜데요, "Wandern"이 가진 의미와, 또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물과 물레방아와 돌에 비유하며 힘차고 경쾌하게 노래합니다.("O Wandern, Wandern, meine Lust, o Wandern.")

(물론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전체의 이야기는 이 첫곡의 느낌과는 다르지요. 좀 신파에 청승스럽기도 한게.. 상당히 '슈베르트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요.ㅋ 저한테 슈베르트는 뭐랄까요, 좀 지나치게 예민하고, 좀 신경질적이면서, 그래서 좀 궁상맞기도 한.. 하여간 아주 섬세하지만, 좀 '센치'한 시인같다고나 할까요, 암튼 그런 이미지입니다. 노다메는 슈베르트보고 "사귀기가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지요.ㅋ) 

이 곡은 흔히 "방랑"이라고 번역되는데, 사실 "방랑"이라는 말은 이 곡의 내용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여기서는 위에서 말한 의미로 "편력"이라 말하는 것이 훨씬 적당하지 않을까 싶네요. 근데, 또 "편력"이라는 말이 좀 딱딱해서 시적인 느낌을 주는 데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긴 하지요. 암튼 그래서 이걸 "방랑"이라 번역하든, "편력"이라 번역하든, 이 곡을 감상할 때는 위에서 얘기된 의미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슈베르트의 잘 알려진 다른 작품 중에서 "방랑자 환상곡"이란 곡도 있지요. 여기서 방랑자에 해당하는 원어도 "Wanderer"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Wandern"의 느낌은 그저 정처없는 방랑에 더 적절하지요. 암튼 슈베르트에게는 여행, 방랑 등의 모티프가 많이 나타납니다. "겨울나그네"도 그렇구요..) 

암튼 제가 좋아하는 노랜데요, 같이 한번 감상해보시죠. 링크를 걸어놓겠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ezGI9VySkfk

가사가 올라와 있는 곳도 많이 있으니 가사를 한번 일독한 후에 감상하시면 더욱 좋을 것 같구요. 참고로, 이 노래의 피아노 반주는 냇물의 흐름을 표현한다는군요.

이상 Wandern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분들이 많아서 몇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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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vinov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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