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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7 낭만적 안티 히어로, 혹은 그래도 세상이 살만한 이유: 다카노 카즈아키 <13계단>, <그레이브 디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

다카노 카즈아키는 <13계단>으로 2001년에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면서 혜성같이 등장한 작가였다. 신인작가의 첫 소설이 어쩌다 히트를 친 거라고 대략 우습게 보면 안 되는 것이, 서스펜스를 엮어가는 솜씨와 탄탄한 전개가 단숨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는, 만만치 않은 기본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뒤이어 발표한 소설들 또한 이 작가가 그저 어쩌다 하늘에서 떨어진 작가는 아님을 보여준다.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는 말이지. 

<13계단>은 사형제도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로 화제가 되었다.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일본에서 나름 시청률의 사나이였던 소리마치 다카시를 주연으로 영화화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영화는 망했을 거다. 영화가 잘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은 없다.) 그러니까...이야기는 한 사형수, 사실 억울하기 그지없게 정황증거상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가 무죄임을 밝히려는 전직 간수와 출소자의 사건해결과정을 그린다. 물론, 사형수가 무죄임을 밝혀나가는, 그러니까,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 중요한 사건은 그게 아니다. 엎치락 뒤치락하는 반전이 적어도 두번 쯤 독자의 뒤통수를 친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나, 플롯의 특징, 특히 사형제도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흥미롭게 얽혀들어가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소설의 주인공 난고와 준이치에 관해서이다.

주인공에 관해서라면 같은 작가의 <그레이브 디거>라는 소설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그레이브 디거>는  <13계단>만큼 치밀한 스케일을 가진 작품은 아니지만(일종의 소품이랄까) 빠른 사건전개와 손을 뗄수 없는 흡입력은 오히려 더하다. (아마 드라마 작가 출신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작가의 소설들은 전적으로 영화적이다. 장면의 전환, 서술의 전개가 보여주기를 염두에 두고 쓰여져 있다. 캐릭터나 사건의 적당한 평면성도 영화나 드라마에 적절한 것 같고. 재미있지만, 그만큼의 약점 또한..) <그레이브 디거>의 주인공 아가미는 도대체 전과가 몇 범인지 기억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범죄 전력을 훈장처럼 가진 전과자인데, 소설은 이 주인공 아가미가 범죄생활을 청산하고 새삶을 살기로 마음먹으면서 시작된다. 아가미는 새 삶을 사는 시작으로 자신의 골수를 불치병을 앓는 아이에게 기증하기로 하는데,  바로 이 순간, 골수기증과 수술일정을 확정한 때에 아가미는 영문모를 연쇄살인에 휘말리고 의문의 집단에 쫓기게 된다.  
 

-인간적인 악당들
<13계단>의, 사형 집행인이었던 기억을 죄스럽게 안고 살아가는 전직 간수인 난고와 상해치사로 복역하고 나온 출소자 준이치는 똑같이 사람을 죽였다는 채무감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자 조금씩 다른 이유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갚음을 하기 위해서 한 사형수의 무죄증명에 뛰어든다. 
 <그레이브 디거>의 범죄자 아가미 또한 십대시절부터 범죄생활을 이어왔지만, 결정적인 범죄, 이를테면 살인은 하지 않았으며, 새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자 악착같이 내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일종의 악당들. 그러니까 살인자 아니면 범죄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인간적이며, 근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에 몰려서도 인간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영웅적이다. 
이들, 범죄자 주인공들은 숱한 안티 히어로 계보에서도 아주 전통적이고 고전적이다. 안티 히어로들이 보여주는 복합성, 이를테면 저 유명한 배트맨조차 자신의 내부에서 악을 발견하고 정의와 불의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에서 고민을 토로하는데, 이들에게는 그러한 복합성이 없다.  단지 옷을 잘못입은 것에 불과한. 그러니까, 근본이 선한 이들이 어쩌다 잘못 악의 옷을 입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일종의 낭만적 안티 히어로라고 할만하다. 2000년대 미스테리에서 나타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라고 할만큼 지극히 낭만적인. 범죄자, 악당의 영웅적인 면모, 해결사로서 그들의 고투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 이제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운 휴머니즘의 증명이다.



-가해자는 어떻게 피해자가 되는가 혹은 피해자는 어떻게 가해자가 되는가
<13계단>에서 준이치는 살인자이지만, 자신을 노리는 또 다른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그레이브 디거>에서 아가미 역시 살아온 내내 강도와 절도, 사기를 일삼아온 범죄의 가해자였지만, 별안간, 살인위협에 시달리는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버린다. 두 소설에서 모두 가해자는 바로 그 범죄의 가해사실 때문에 정확히 피해자로 역전된다. 스릴이 발생하는 지점 또한 이러한 역전에 있지만, 보다 흥미로운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전은 사실 관계의 연쇄 속에서 필연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한 사람으로 결코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가족, 친구, 그의 적대자, 그의 채무자 등등으로 보이지않게 펼쳐져 있다. 누구나 사회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것은 연쇄적으로 그 영향을 퍼뜨린다. 이를테면 살인이나 범죄 또한. 따라서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만나며, 두 위치가 역전되는 순간이 마련된다. (드물기는 하지만)  범죄의 피해자가 항상 도덕적 우위를 가지는 것도 아니고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악한이 되지 않는 순간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정한 범죄자는 누구인가 : 제도와 권력의 문제
가해자 악당이 영웅으로 밝혀내는 진정한 범죄의 진정한 죄인은 누구인가. 가해자와 피해자는 사실 누구랄 것도 없이 등가적인 위치, 동시에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이다. 이 경우, 존재하는 살인과 범죄의 진정한 책임은 그럼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결국 두 소설이 맞닿는 지점은 이 결말에 있어 동일한데, 살인과 범죄의 진정한 책임은 이제 제도와 권력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13계단>에서 그것이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제기였다면, <그레이브 디거>에서는 노골적으로 정치인과 관료의 권력집단이 된다. (익히 일본 수사물 드라마에서 봐왔던 구조대로, 진정한 악은 결국 권력집단, 경찰청 내부의 배신자, 카리스마있던 고위 관료) 범죄와 살인의 책임은 인간이 인간을 떠나는 순간, 인간이 인간임을 잃게되는 제도에서, 권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권력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가 되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언제나 문제는 썩은 사과 한 알이기 때문에, 썩은 사과 한 알을 상자에서 꺼내고 내부의 권력집단을 정화하는 주체, 주인공들의 협력자가 존재하고 그런 점에서 권력집단이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속편하게 믿어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13계단>에서 또 다른 주인공 난고가 사형집행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코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 것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본의 수사물 드라마들의 공식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실, 일본의 많은 드라마들이 줄기차게 권력과 제도의 타락을 외치는데, 그 해결은 언제나 내부고발자, 내부의 영웅에게 맡겨진다. 수사물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도 방영되었으니 많은 이들이 알만한 <하얀 거탑>같은 경우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 권력과 제도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얄팍한 휴머니즘이 매주 드라마에서 한 번 이상은 나타나는 것 같다.)


결국, 두 소설은 인간적인 범죄자 영웅이 반인간적인 제도 혹은 권력과 맞서서 인간성의 회복을 부르짖는 이야기인데(그러니까,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다는 것이지. 이토록 선한 사람들과 함께), 이렇게 낭만적인 이야기가 속편하고 개운하기도 한 법이다. 사실, 현실은 너무 잔인하고, 괴로워서 결코 직면하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농담이 아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재미있단 말이다.)





- <13계단>의 한국어판 뒤에는 다카노 카즈아키를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자로 선정한 미미여사의 선정이유가  붙어 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일본 추리소설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미미여사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니 어케 이럴수가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음 편에는 미미여사의 대표작 두편, <이유>와 <화차>에 대해서 함 올려볼란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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