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분과학문을 넘어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철학계의 스타 중 하나인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철학자로서의 지젝의 관심사는 오늘날 철학의 전문영역으로 여겨지는 부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거의 전 방위로 뻗어 있으며, 심지어 영화나 tv 드라마 혹은 농담까지도 그의 사유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런 식의 폭넓은 관심, 혹은 분과학문 체계를 넘어서는 것 자체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제임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중요한 것은 분과학문 체계에 갇히지 않고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폭넓은 관심 분야는 이러한 그의 태도의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지젝이 오늘날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로는 무엇보다 논증 내지 논변(이른바 argument)을 사례로 대신하는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글을 전개해 나간다기보다는 엮어나간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한데, 그것은 많은 곳에서 그가 일반적으로 철학의 전형적 글쓰기 방식으로 인식되는 논증을 거의 무차별적인 사례의 연속적 제시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서 제시되는 무차별적 사례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으면서 어려운 철학적 논의를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막상 그의 글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생각보다 그의 글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사실 그의 글은 아주 어렵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의 글이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이나 세세한 논증을 생략하고 이를 사례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그의 글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례는 그 밑에 깔려 있는 논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한다. 독자들은 이 사례들을 통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기저의 논리를 다시 재구성해내야 한다. 그의 사례들이 재밌긴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건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이는 그 기저의 논리를 정확히 파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 그의 글은 많은 전문적 논의들을 전제하고 있다. 예컨대 (정신분석 및 맑스주의와 함께) 그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원천으로 꼽히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그의 논의에는 앨리슨(Henry Allison)이나 롱그니스(Beatrice Longuenesse), 혹은 피핀(Robert Pippin)과 같은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일급 학자들의 해석,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나오게 된 수용사적 맥락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 논의들을 잘 알지 못하면,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주장은 사실상 이해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의 글에서 전문적이고 이론적인 논의가 사실상 생략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논의는 표면적인 글쓰기 과정에서 숨겨져 있을 뿐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한자한자 의미를 따져가는 전문가들의 전문적 논의가 쓸데없는 짓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글과 보다 본격적인 다른 철학적 저서들, 예컨대 칸트나 하이데거의 책들의 차이는 현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며, 그의 논의 역시 본격적 철학적 논의의 한 형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그의 본격적인 철학적 저서들은 점점 이러한 전통적인 책들의 형태와 유사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들은 과거의 글들에 비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왜 하필이면 논증보다 사례를 중시하는 이와 같은 글쓰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겠다는 것 이상의 욕망이 깔려 있다. 내가 보기에 그가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그가 그들과 다른 욕망, 즉 흔히 말하는 철학적 논의 이상의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아카데미의 다른 많은 철학자들과는 달리 철학적 논증과 정당화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적 논의가 철학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유한 영역, 철학을 철학이게 하는 정상적인 규범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사회의 다른 부분들이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진정한 사유에 대한 욕구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이는 현실과의 만남 속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들뢰즈의 반()철학적 태도를 반대하며 철학을 옹호하는 바디우를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 b), 8-10 참조.)

그리고 논증을 사례 제시로 대체하는 그의 글쓰기 방식은 여러 철학적 논의들을 현실과 매개하여 전개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전략적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사례는 고도로 추상적이어서 현실과의 접점 없이 진행되기 쉬운 철학적 논의를 현실과 관련시켜 전개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는 사례를 연속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철학적 논의가 이미 현실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지젝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글쓰기를 채택하게 만든 그의 욕망이다. 그것은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의 독자적이고 완성된 영역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아카데미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 철학은 철학을 넘어설 때에만 진정한 철학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지젝의 글쓰기에 깔려 있는 그의 욕망인 것이다.

Posted by vinoveri
,

1.

미국의 맑스주의 학자이자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주 난삽하고 난해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많은 혐의와 비판을 받아왔다. 말하자면, 비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식인이 배운 티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역사의 발전을 위해 싸운다는 진보적 지식인조차 그토록 어렵게 글을 써야 하는가? 왜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글이 난해하다는 지적이 단지 독자들의 이해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식의 고도로 복잡한, 매개된 글쓰기가 자명한 현실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당면한 싸움의 전선 자체를 흐려놓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국의 또 다른 맑스주의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제임슨의 이른바 변증법적 비평이 첨예한 실제 현실을 외면하고 당면한 싸움을 변증법이란 이름하에 해소해 버린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저 세련된 변증법이 밥 먹여주냐라는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의 거친 진실,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세속적비평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이경덕, <‘세련된변증법이 아닌, 현실에 밀착된 변증법을 향하여>, http://blog.aladin.co.kr:80/mramor/1696117 참조. 거친 사고(plumpes Denken)’당대의 복잡하고 사변적인 맑스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내세운 브레히트의 모토였다. “하지만 거친 사고야말로 현실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거칠게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거친 사고, 그것은 위대한 자들의 사고이다.”(브레히트, <서푼짜리소설> 중에서)) 나아가, 이러한 그의 글쓰기 방식이 결국 진보적 대중운동으로부터 지식인이 고립되어 있는 미국이라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의 상황을 보여줄 뿐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제임슨 또한 이런 식의 비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식의 복잡한 글쓰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해왔다. 그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백지상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계급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문화 등의 상황과 맥락 안에 들어와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맥락을 탈신비화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브레히트가 말하는 거친 사고 역시 과도하게 복잡해진 헤겔주의나 철학적 맑스주의라는 당대적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글 <역사 속의 비평>의 시작 부분에서.)

나아가,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하나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 특히 그가 몸담고 있는 영미의 아카데미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파편화된 현실에 집착하는 경험론적 사고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밀폐된 칸막이로 분할하고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법률적인 것, 역사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을 면밀히 구분함으로써 특정 문제에 함축된 모든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창비), 359-60)이다. 이러한 방식의 사고는 많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양산하지만, 사회생활 전체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는 총체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복잡한 글쓰기는 이러한 자본주의가 낳은 사물화와 파편화, 특히 미국의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학문적 풍토에 대응하기 위한 그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의 글 곳곳에서 행해지는 거의 무차별적인 인용과 전유 내지 이른바 그의 약호전환(transcoding)’ 전략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비록 그에게 많은 프랑스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자의식, 이를테면 스타일에의 의지(will to style)’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점점 고도로 분화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는 오늘날 우리의 학문 풍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사실, 오늘날 대학민국의 제도권 학문의 기본 모델이 바로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미국의 아카데미이다.) ‘통섭이나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 연구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것도 이러한 학문적 풍토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임슨의 주장이 이러한 요구와 다른 점은 분과학문 체계의 해체 자체가 그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여러 간학문적 연구에 대한 요구들이 흔히 보다 폭넓은 지식에 대한 요구, 즉 분과학문적 지식을 넘어선 포괄적 지식에 대한 요구에 그치는 반면, 제임슨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분과학문으로 나눠져 있을 때 볼 수 없는 것, 분과학문으로는 알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앎에 대한 요구라 할 수 있다.

결국 언어적 매개를 넘어선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앎 자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제임슨이 이글턴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그는 이 현실이란 것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끊임없이 보여주고자 한다. 그의 글이 그처럼 복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토질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못 생겼다 욕한다." (브레히트)



(*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블로그의 먼지를 털어내고 이제 다시 활동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예전처럼 힘을 합쳐 활발한 대화를 다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네요.)

 

Posted by vinoveri
,

본 블로그에 초안을 올렸던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시대에 고함>이 책으로 나와 교보문고에서 이벤트까지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3.10(수) 저녁7:30에 교보본사 이벤트홀(세종문화회관 뒤 경희궁의 아침4단지)에서 저자강연회도 하게 됐습니다.

많이 부족할지라도 사람들한테 말걸고 이야기 듣고 더 좋은 방향 찾아보고 하는 일을 계속 해보렵니다

아무쪼록 많은 관심과 호응 부탁드립니다!

'공지/알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덧 9월입니다..  (5) 2009.09.0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새해를 맞이해 세미나를 시작합니다.

요새 한창 인기가 절정인 '칼 폴라니'로 진행합니다.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지하조직처럼 움직였던 세미나팀을 이름도 정하고 팀원에게 역할도 부여해 외연도 넓히고 내실도 쌓을 생각입니다.

제가 일단 가칭으로 세미나팀 이름을 '정치학적 상상력'이라고 지어보았습니다. 그 역할은 행동부장이라고 지어보았구요~ ^^

올 겨울 눈이 참 펑펑 많이도 오는데 오손도손 앉아 서로의 체온과 열정으로 추위를 녹여보도록 하겠습니다!!!


-----------------------------------------------------------------------


정치학적 상상력 (2010년 겨울)

Karl Polanyi 세미나 Syllabus

작성자: 김종일(정치학적 상상력 행동부장)


Text :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Boston: Beacon Press, 1957)

칼 폴라니.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길.

Place :

한성대입구역 세미나실

Time :

2010년 겨울, 매주 수요일 늦은 7시(1-2월)


1주차: 이론에 대한 개관

- Introduction

- 칼 폴라니.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길, 옮긴이 해제, pp. 605-635

- 칼 폴라니.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길, 프레드 블록의 해제, pp. 31-59


2주차 : “Satanic Mills" - 자기조정시장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Boston: Beacon Press, 1957), Chs. 3-6 (pp. 33-76)

칼 폴라니.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길, 제2부 시장경제의 흥망, 1장 사탄의 맷돌, pp. 161-248

참고서적

- 김영진, 2005, 『시장자유주의를 넘어서: 칼 폴라니의 사회경제론』. 한울아카데미, 제4장, 시장경제의 기원과 전개, pp. 77-91


3주차 : “Satanic Mills" - 스피넘랜드 법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Boston: Beacon Press, 1957), Chs. 9 & 10(pp. 103-129)

칼 폴라니.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길, 제2부 시장경제의 흥망, 1장 사탄의 맷돌, pp. 249-373

참고서적

- 김영진, 2005, 『시장자유주의를 넘어서: 칼 폴라니의 사회경제론』. 한울아카데미, 제4장, 시장경제의 기원과 전개, pp. 92-104


4주차 : “Double Movement"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Boston: Beacon Press, 1957), Chs. 11, 14 & 18 (pp. 130-134 & 163-219)

칼 폴라니.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길, 제2부 시장경제의 흥망, 2장 사회의 자기 보호, pp. 375-463

참고서적

- 김영진, 2005, 『시장자유주의를 넘어서: 칼 폴라니의 사회경제론』. 한울아카데미, 제5장, 시장경제의 이중운동, pp. 105-128


5주차 : “Double Movement"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Boston: Beacon Press, 1957), Chs. 11, 14 & 18 (pp. 130-134 & 163-219)

칼 폴라니.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길, 제2부 시장경제의 흥망, 2장 사회의 자기 보호, pp. 464-538

참고서적

- 김영진, 2005, 『시장자유주의를 넘어서: 칼 폴라니의 사회경제론』. 한울아카데미, 제6장, 시장경제와 국제정치경제, pp. 129-144


6주차 : “폴라니는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는가”

- 종합토론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Boston: Beacon Press, 1957), Chs. 19~21

칼 폴라니.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길, 제3부 진행 중인 전환, 19-21장, pp. 541-604

참고서적

- 김영진, 2005, 『시장자유주의를 넘어서: 칼 폴라니의 사회경제론』. 한울아카데미, 제7장, 대안적 사회의 전제들, pp. 145-14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가을입니다. 단풍이 정말 멋진 요즘, 단풍구경을 하러 떠나고 싶지만 캠퍼스에서의 커피 한 잔의 여유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롱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도매점에서 사온 소세지와 통조림도 일주일에 한두번씩 먹으면서 매일 살이 조금씩 찌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밖에서 산책을 시킬 수가 없으니, 식사량을 조금만 늘려도 살이 푹푹 찌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아롱이가 선물로 들어온 케익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진입니다. 결국 이 날 쿡~하고 케익을 찍어 먹었답니다... ^^ 그 장면을 사진으로 담았어야 했는데, 설마설마하다가 놓치고 말았답니다. 이 날 혼내랴, 씻기랴, 웃느라 참 정신이 없었습니다~ ^^;;;

주위의 이야기를 들으니, 반려동물에게 사람의 음식을 주는 건 정말 해가 되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음식은 간이 되어 있고, 기타 첨가물이 많아 동물에게는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음식에 손(?)을 못 대게 하는데 생각처럼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아롱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떠먹는 요쿠르트, 구운 오징어, 참치, 참외 등입니다. 특히 요새 가족들이 요쿠르트 먹을 때 그 앞에 앉아 자기한테 요쿠르트 묻은 뚜껑껍질을 달라고 시위를 한답니다~ ㅎㅎㅎ


 

이 사진은 아롱이가 여가생활을 보내고 있는 사진입니다. 장소는 요새 놀이터처럼 놀고 있는 박스입니다~ ^^ 고양이의 특징인지 아롱이의 특징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정말 쇼핑봉투와 박스를 좋아합니다. 사진처럼 박스에서는 쉬기도하고 놀이터처럼 흔들흔들 놀이기구 타듯이 놀기도 합니다. 더 재미있는 건 쇼핑봉투가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그 쇼핑 봉투에 얼굴만 박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바둥바둥 거리는 걸 보면 귀엽기도 하고 멍청해보이기도 하고 웃음이 난답니다~



아롱이의 최근 근황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역시 낮잠입니다~ *^^*
아롱이가 왜 저렇게 자나했더니, 형광등 불빛이 밝아 눈을 가리고 자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 소파는 원래 엄마가 애용하시던 소파인데 얼마 전부터 아롱이가 차지해버렸습니다. 저 소파 위에 바로 형광등이 있어 눈이 부시면 저렇게 눈을 가리고 낮잠을 곤하게 잔답니다~ ㅎㅎㅎ 아직까지 아롱이는 잠꼬대를 하거나 코를 골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렇게 너무 귀여운 포즈로 잠을 자서 한없이 구경을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답니다~ ㅎㅎㅎ

아롱이는 가을이 됐는데도 아직 털갈이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 겨울이 되면 더 털이 부숙부숙 많아지는 걸 보게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롱이에게도 우리에게도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겨울 준비를 하시는만큼 지금의 계절, 가을을 즐기는 여유를 갖는 주말 보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