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노 카즈아키는 <13계단>으로 2001년에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면서 혜성같이 등장한 작가였다. 신인작가의 첫 소설이 어쩌다 히트를 친 거라고 대략 우습게 보면 안 되는 것이, 서스펜스를 엮어가는 솜씨와 탄탄한 전개가 단숨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는, 만만치 않은 기본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뒤이어 발표한 소설들 또한 이 작가가 그저 어쩌다 하늘에서 떨어진 작가는 아님을 보여준다.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는 말이지. 

<13계단>은 사형제도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로 화제가 되었다.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일본에서 나름 시청률의 사나이였던 소리마치 다카시를 주연으로 영화화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영화는 망했을 거다. 영화가 잘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은 없다.) 그러니까...이야기는 한 사형수, 사실 억울하기 그지없게 정황증거상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가 무죄임을 밝히려는 전직 간수와 출소자의 사건해결과정을 그린다. 물론, 사형수가 무죄임을 밝혀나가는, 그러니까,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 중요한 사건은 그게 아니다. 엎치락 뒤치락하는 반전이 적어도 두번 쯤 독자의 뒤통수를 친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나, 플롯의 특징, 특히 사형제도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흥미롭게 얽혀들어가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소설의 주인공 난고와 준이치에 관해서이다.

주인공에 관해서라면 같은 작가의 <그레이브 디거>라는 소설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그레이브 디거>는  <13계단>만큼 치밀한 스케일을 가진 작품은 아니지만(일종의 소품이랄까) 빠른 사건전개와 손을 뗄수 없는 흡입력은 오히려 더하다. (아마 드라마 작가 출신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작가의 소설들은 전적으로 영화적이다. 장면의 전환, 서술의 전개가 보여주기를 염두에 두고 쓰여져 있다. 캐릭터나 사건의 적당한 평면성도 영화나 드라마에 적절한 것 같고. 재미있지만, 그만큼의 약점 또한..) <그레이브 디거>의 주인공 아가미는 도대체 전과가 몇 범인지 기억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범죄 전력을 훈장처럼 가진 전과자인데, 소설은 이 주인공 아가미가 범죄생활을 청산하고 새삶을 살기로 마음먹으면서 시작된다. 아가미는 새 삶을 사는 시작으로 자신의 골수를 불치병을 앓는 아이에게 기증하기로 하는데,  바로 이 순간, 골수기증과 수술일정을 확정한 때에 아가미는 영문모를 연쇄살인에 휘말리고 의문의 집단에 쫓기게 된다.  
 

-인간적인 악당들
<13계단>의, 사형 집행인이었던 기억을 죄스럽게 안고 살아가는 전직 간수인 난고와 상해치사로 복역하고 나온 출소자 준이치는 똑같이 사람을 죽였다는 채무감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자 조금씩 다른 이유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갚음을 하기 위해서 한 사형수의 무죄증명에 뛰어든다. 
 <그레이브 디거>의 범죄자 아가미 또한 십대시절부터 범죄생활을 이어왔지만, 결정적인 범죄, 이를테면 살인은 하지 않았으며, 새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자 악착같이 내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일종의 악당들. 그러니까 살인자 아니면 범죄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인간적이며, 근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에 몰려서도 인간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영웅적이다. 
이들, 범죄자 주인공들은 숱한 안티 히어로 계보에서도 아주 전통적이고 고전적이다. 안티 히어로들이 보여주는 복합성, 이를테면 저 유명한 배트맨조차 자신의 내부에서 악을 발견하고 정의와 불의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에서 고민을 토로하는데, 이들에게는 그러한 복합성이 없다.  단지 옷을 잘못입은 것에 불과한. 그러니까, 근본이 선한 이들이 어쩌다 잘못 악의 옷을 입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일종의 낭만적 안티 히어로라고 할만하다. 2000년대 미스테리에서 나타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라고 할만큼 지극히 낭만적인. 범죄자, 악당의 영웅적인 면모, 해결사로서 그들의 고투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 이제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운 휴머니즘의 증명이다.



-가해자는 어떻게 피해자가 되는가 혹은 피해자는 어떻게 가해자가 되는가
<13계단>에서 준이치는 살인자이지만, 자신을 노리는 또 다른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그레이브 디거>에서 아가미 역시 살아온 내내 강도와 절도, 사기를 일삼아온 범죄의 가해자였지만, 별안간, 살인위협에 시달리는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버린다. 두 소설에서 모두 가해자는 바로 그 범죄의 가해사실 때문에 정확히 피해자로 역전된다. 스릴이 발생하는 지점 또한 이러한 역전에 있지만, 보다 흥미로운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전은 사실 관계의 연쇄 속에서 필연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한 사람으로 결코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가족, 친구, 그의 적대자, 그의 채무자 등등으로 보이지않게 펼쳐져 있다. 누구나 사회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것은 연쇄적으로 그 영향을 퍼뜨린다. 이를테면 살인이나 범죄 또한. 따라서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만나며, 두 위치가 역전되는 순간이 마련된다. (드물기는 하지만)  범죄의 피해자가 항상 도덕적 우위를 가지는 것도 아니고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악한이 되지 않는 순간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정한 범죄자는 누구인가 : 제도와 권력의 문제
가해자 악당이 영웅으로 밝혀내는 진정한 범죄의 진정한 죄인은 누구인가. 가해자와 피해자는 사실 누구랄 것도 없이 등가적인 위치, 동시에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이다. 이 경우, 존재하는 살인과 범죄의 진정한 책임은 그럼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결국 두 소설이 맞닿는 지점은 이 결말에 있어 동일한데, 살인과 범죄의 진정한 책임은 이제 제도와 권력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13계단>에서 그것이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제기였다면, <그레이브 디거>에서는 노골적으로 정치인과 관료의 권력집단이 된다. (익히 일본 수사물 드라마에서 봐왔던 구조대로, 진정한 악은 결국 권력집단, 경찰청 내부의 배신자, 카리스마있던 고위 관료) 범죄와 살인의 책임은 인간이 인간을 떠나는 순간, 인간이 인간임을 잃게되는 제도에서, 권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권력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가 되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언제나 문제는 썩은 사과 한 알이기 때문에, 썩은 사과 한 알을 상자에서 꺼내고 내부의 권력집단을 정화하는 주체, 주인공들의 협력자가 존재하고 그런 점에서 권력집단이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속편하게 믿어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13계단>에서 또 다른 주인공 난고가 사형집행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코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 것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본의 수사물 드라마들의 공식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실, 일본의 많은 드라마들이 줄기차게 권력과 제도의 타락을 외치는데, 그 해결은 언제나 내부고발자, 내부의 영웅에게 맡겨진다. 수사물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도 방영되었으니 많은 이들이 알만한 <하얀 거탑>같은 경우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 권력과 제도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얄팍한 휴머니즘이 매주 드라마에서 한 번 이상은 나타나는 것 같다.)


결국, 두 소설은 인간적인 범죄자 영웅이 반인간적인 제도 혹은 권력과 맞서서 인간성의 회복을 부르짖는 이야기인데(그러니까,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다는 것이지. 이토록 선한 사람들과 함께), 이렇게 낭만적인 이야기가 속편하고 개운하기도 한 법이다. 사실, 현실은 너무 잔인하고, 괴로워서 결코 직면하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농담이 아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재미있단 말이다.)





- <13계단>의 한국어판 뒤에는 다카노 카즈아키를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자로 선정한 미미여사의 선정이유가  붙어 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일본 추리소설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미미여사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니 어케 이럴수가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음 편에는 미미여사의 대표작 두편, <이유>와 <화차>에 대해서 함 올려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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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트 만델이 탁월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범죄소설은  자본주의 사회의 충실한 반영이다. 범죄와 살인은 곧 사유재산과 그 주체인 개인에 대한 공격이며, 범죄소설이 이를 어떻게 다루는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직설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범죄소설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균열과 위기는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봉합되는가, 다시, 사회는 모든 개인에게 안전한 어떤 것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인가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셜록 홈즈, 그리고 이어진 명탐정 의 시대야말로 자본주의적 열정의 시대이기도..


고전 미스테리의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다시금 통합되어 문제없이 작동하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괴한 살인사건이라도 반드시 해결되고야 만다. 범죄와 살인은 한정된 사람들 사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현실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인공적인 퍼즐-수수께끼가 사건의 핵심이 되고, 또한 이를 합리적이고 냉정한 추리로 해결해가는 탐정이 존재한다. 기이한 연쇄살인, 수많은 피해자, 살인사건은 마침내 살인의 해결을 설명하는 탐정의 활약상을 위해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된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활약하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들에서 이 명탐정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사건의 전모와 범인을 밝혀낸다. 물론,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빼놓지 않으면서. 사실 긴다이치 코스케 뿐이랴, 에르큘 포와로, 파일로 번스, 엘러리 퀸 등 역사상 유명한 명탐정은 누구도 사건의 희생자를 구하지 못했다. 뻔히 그 시점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명탐정의 규칙>이라는 드라마-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원작이다-에서는 이를 재치있게 패러디하고 있다.) 

이는 부르주아적 이성의 승리라는 확신에 찬 드라마를 위해  범죄와 살인을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이다. 범죄와 살인은 사회의 일시적 흔들림이며, 위기일지언정 근본적인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설득. 퍼즐이 정교할수록 현실의 범죄가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가 안정적으로 통합될 수 없는 것임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범죄는 일상적임을, 사실상 사회가 안전하지 않음을, 살인이 넘쳐나고 있음을 외면해왔던 것은 확실히 자본주의 사회의 정신과 열정이 유효한 시대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범죄와 살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이며, 하나로 통합된 사회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범죄소설들은 결국 사회가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근본적인 균열을 지니고 있음을 증언할 수밖에 없다. 하드보일드 소설, 스파이 소설, 법정, 의학, 기업 등등의 다종다양한 분야의 스릴러 소설들, 미스테리 소설사는 이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집약된 자본주의 사회사이기도 하다.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1998), <아임소리마마>의 주인공들은 사회에서 내몰려 경계에 위치한 여성들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여성 주인공들이 구축한 놀랄만한 개성은 무척 흥미롭고(언젠가, 범죄소설들의 인물들에 대해서 쓸 기회가 있다면 꼭 빠뜨릴 수 없는 범죄자들이다) 역동적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주류집단에서 배제된 아웃사이더들이며, 소수집단이자 그로 인한 차별과 학대의 기억을 화인처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들이 놓인 경제적 계급을 명확히 드러내고 공들여 묘사한다. 저학력, 비정규직, 게다가 여성, 이들이 놓인 삶의 환경 자체는 범죄와 필연적으로 맞물린다. 고통과 빈곤, 겹겹이 쌓인 착취에 내몰려 생존 그 자체 이외에 다른 목적이 사라지는 이런 삶에서 살인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이 된다. 선 혹은 악, 범죄에 대한 감각은 생계, 혹은 하루의 생존으로 간단히 흡수되어 버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그래서 약한 자가 희생되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이미 범죄, 살인의 유무 혹은 경중, 즉 선과 악이라는 것은 가릴 수 없는 처지이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폭력과 학대, 착취의 고통과 우발적 살인 중 무엇이 더 나쁜지, 혹은 위법하지 않은 악의적 차별과 솔직한 증오 중에 무엇이 더 범죄적인지? 여기서는 결국, 인간이란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가차없이 희생되는 짐승의 세계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매일이 그러하듯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결코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기리노 나쓰오 소설에서 가족은 박살났으며, 오히려 상처의 근원, 살인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런 점은 (사실 전혀 다른 소설인데도) <미스틱 리버>(2001)가 공유하는 지점이다. 데니스 루헤인이 창조해낸 치밀한 캐릭터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세 사람은 그들 각각의 고통과 상처가 어떠하든, 약한 자는 희생되고,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는 점을 충실히 보여준다. 선과 악이 더 이상 명확히 구분가지 않는 세계, 범죄와 살인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세계, 약점이 보이면 가차없이 먹잇감이 되는 세계. 살아 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빈곤한 노동계급의 삶에서 탈출하여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신분상승을 이루고 여피들의 세계에 진입하여) 고급 주택가 거리로 이동하든지, 누구도 만만하게 볼 수 없을만큼 강해지든지. 

그러니까, 이미 법 혹은 정의, 인과응보 혹은 선이 보답받는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얄팍한 것이나마 날것 그대로의 범죄와는 거리가 있는 여피들 혹은 중산층의 세계에나 통용되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 그 자체가 전쟁인 하층 노동계급의 삶 속에서 범인이라고 해서 나쁜 놈만은 아니며, 살인이 그저 단순히 악한 것만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연약하고 순진한 것은 희생될 수 밖에 없으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이겨내고 살아서 귀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읽는 이들은 그래서, 범인에게 이입하고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미워할 수 없는 괴물같은 살인범. 그들은  어쨌든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강인한 자인 것이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법은 무력하며, 희생자는 가엾게도 그 죽음을 보상받지 못한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 범죄소설이 다다를 수 밖에 없는 지점이다.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살아남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은폐할래야 은폐할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모든 가치와 삶이 생존으로, 살아남는 것으로 환원되는 세계는 출구가 없다. 이 소설들은 명확히 이것이 바로 빈곤계급의 삶이며, 사회가 명확히 계급적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리지만, 동시에 어떤 해결책, 어떤 대안도 없다고 뚜렷하게 선언한다. 도대체 계급의 이동, 다른 세계로의 탈출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위협, 삶의 불안정은 다름 아니라, 당신이 설혹 이 세계와는 무관한 중산층일지 몰라도, 언제 실업으로 혹은 채무로 인해 바로 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어쩌란 말인가, 바로 그러한 이유로 무엇보다 강한 자에 대한 은밀한 매혹이 중심에 서게 된다. 어떻게 되든, 강해져야 하며, 어떻든지 간에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 범죄와 살인은 약육강식의 드라마이자, 약자와 강자의 치열한 게임이 된다. 누구도 왜라고 묻지 않는 세계에서 어떻게 버틸 것인가의 문제. 이 시대의 범죄소설은 사회의 분열을 보여줄지언정, 그것으로 더욱 철저한 무력감을 안겨준다. 이를테면, 냉소. 이미 이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테니까 알아서 조심하도록 해...라는 식의.  

미스틱 리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로 만들어 숀펜과 팀 로빈스에게 아카데미 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잘 어울리지 않는가. 이 소설이야말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화할만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강자와 약자는 가족의 가치를 수호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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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요코미조 세이시//정명원 옮김, 시공사. 2007. 7월

이치가와 곤의 영화 [악마의 공놀이 노래] 포스터


(생각난 김에, <비숍살인사건>(S.S.반다인/김성종 옮김(그 김성종!), 동서문화사, 2003. 1. 동서문화사판 추리문고의 초판은 1977년이다.)

구전되어오는 노래의 내용에 따라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아이디어는 꽤나 흥미롭다. 그런만큼 수많은 미스터리에서 노래에 맞춰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잘 활용해왔다. 이를테면 마더 구즈의 노래를 테마로 살인사건이 짜이고 풀려가는 걸작 미스터리들이 즐비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국살인>이나, <주머니에 호밀을>같은 작품들이 있고, 엘러리 퀸 역시 이를 종종 활용했다(<일곱번째 살인사건>). 아마도 이 계열에 첫 손 꼽힐 작품은 반 다인의 <비숍살인사건>일 텐데, 동요살인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대표하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란 것은 사실, 정해진 해석이 있을 수가 없다. 게다가 삶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것인만큼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많다. 추리소설들이 애용해 마지않는 마더구즈의 노래만 하더라도 (18세기 이래로 영국에서 전해내려온 이 자장가들에는 지금의 감각에서는 애들에게 결코 들려주지 않았을 강도와 범죄, 폭력과 살해가 넘쳐난다. 그럴수밖에, 마더구즈는 지독히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민중들의 노래이니까) 악의없이 명랑하게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죽여 버린다.

(로버트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마더구즈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이야기보다 영국의 동요들은 쾌활하고 변덕적이며, 명백히 그것이 비유하는 사건이나 인물보다 어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단턴은 그 이유를 영국의 동요들이 비교적 사람들이 먹고 살만해졌던 17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럼에도 마더구즈에는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폭력과 절망, 죽음의 세계가 깃들어 있다. 사람들의 오랜 노래라는 것은 결코 사람들의 삶에서 떠나지 않는 법이다. 또 하나 흥미있는 것은 프랑스에서 민담이 발전하고 동요가 발전하지 못한만큼, 영국에서는 동요가 발전하고 민담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 영국의 그것이 프랑스의 것보다 항시 해학적이고 명랑하며 변덕적이라는 단턴의 언급.)

마더구즈가 미스터리에서 선호되는 이유는 아마도 그 형식과 내용의 불균형 때문일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흥얼거리게 되는, 각운을 맞춰놓은 유쾌한 노래들이,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섬뜩하게도 줄창 누가 죽어나가는 얘기이다. 그런데 도대체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워낙이 노래란 것이 이야기하고 달라서 내용을 전하기 위한 게 아니라 부르기 좋아야 하는 법이다. 운율이 중요하지 정확성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러다보면 노래 내용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수수께끼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Who killed Cock Robin?
I, said the Sparrow,
With my bow and arrow,
I killed Cock Robin.

Who saw him die?
I, said the Fly,
With my little eye,
I saw him die.
(이하략)

누가 울새를 죽였나?
참새가
'내가 활과 화살로
울새를 죽였네'라고 말했네.

누가 그가 죽는 것을 보았지?
파리가
'내 작은 눈으로
그가 죽는 것을 보았네'라고 말했네.

<비숍살인사건>에 등장하는 마더구즈, 누가 울새를 죽였나 인데, 노래 전체가 수수께끼이다. (각운때문이 아니라면)대체 왜 참새가 활과 화살로 울새를 죽인단 말인가 (아, 이 노래를 그대로 가져온 델리 스파이스의 노래가 있는데, 아마 제목도 누가 울새를 죽였나 일거다. 그 노래를 듣고 델리 스파이스는 미스터리 팬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미스터리 팬이 아니고, 영어조기교육에  정신나간 학부모가 아니면 누가 마더구즈에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수수께끼로 가득찬 노래가 미스터리에서 서사 장치로 작동하게 되면, 일종의 극중극, 액자짜기가 가능해진다. 노래를 매개로 사건은 노래 안의 서사와 노래 밖의 서사로 나뉘어진다. 이야기는 그래서 원래 노래의 의미는 무엇이고, 노래는 어떻게 귀결되는지를 찾아가는 것과, 노래 밖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이후의 살인이 어떻게 이어질지, 그리고 노래를 이용한 살인의 범인은 누구인지, 왜 노래를 이용하는지의 이야기가 겹치게 된다. 동요의 풍부한 상징이 안팎을 연결하면서 이야기의 짜임이 촘촘하게 엮이게 되는데, 이런 장치를 활용하는 미스터리는 살인사건에 극적인 서사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숨겨진 이야기, 누구도 몰랐던 범인의 과거가 노래와 엮이게 되는 식이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1959)가 이런 식의 전형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대체로 신파적이고 통속적인 스토리를 잘 엮는데-멜로 드라마의 전형!-이 역시, 범인과 희생자의 과거, 출생의 비밀이 노래에 담겨있다. 바람둥이 남자에게 버려진 여인의 비극이 수많은 연쇄살인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지극히 신파적으로 짜여진 미스터리.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역시 과거의 범죄가 현재의 연쇄살인의 시작이다, 물론 둘을 엮는 것은 마더구즈의 노래, 열개의 인디언 인형.)  

또한 노래는 그 자체가 일종의 암호로 기능한다. 살인사건과 노래를 대응시켜가면서 노래 자체를 살인사건의 상징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노래와 살인사건이 얽힐 때, 일차적인 기대는 노래에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실제로 노래와 관련해서 비밀을 짜고 이야기를 얽을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전제하고 적극적으로 살인사건의 요소로 활용할 수도 있다. 범죄를 조작하고, 알리바이를 만들고, 범인을 다른 사람으로 지목하게 하는 등. 물론 이런 장치로 활용될 수 있는 것 역시 노래가 살인사건에 또 하나의 서사, 이야기를 주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노래는 일종의 맥거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스터리 내내 관심의 초점은 뭔가 의미심장한 노래에 가 있지만, 실제 살인사건은 그와 전혀 무관하게 벌어진다. <비숍살인사건>(1929)은 이런 미스터리의 고전이며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마더구즈와 함께 진행되는 연쇄살인에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질리지만, 사실  마더구즈는 범인에게 범죄를 은폐하고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우연히 선택된 요소에 불과하다. 


아마도 이런 기법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장미의 이름>일 것이다. 노래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예언이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살인사건 속에서 허구의 또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쓸데없이 또 하나의 이야기의 진실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그 다음은...을 초조해하게 만드는 것, 즉,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효과적인 장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미스터리는 사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통제되는 세계안에서 가능하다. 동요 혹은 잘 알려진 이야기에 따라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범인이 창출한 세계가 인위적이며 처음과 끝이 존재하는 닫힌 공간임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요 혹은 자장가는 사람들에게 그저 자장가이고 동요일 뿐이다. 그게 다른 의미를 가지는 세계는 고립된 특별한 공간, 일상적 삶과 분리된 살인사건만을 위한 공간이 된다.
이야말로 밀실살인과 더불어 퍼즐풀이 고전 미스터리의 한 전형이다. 그런만큼 최근의 미스터리(적어도 현대의 범죄와 살인을 의식하는)와는 꽤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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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윤성원 옮김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9. 4.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소설 7편을 묶은 단편집. 원래 1994년에 나온 책이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범인 혹은 범인의 동기에는 일종의 센티멘탈이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7편의 단편들은 그런 경향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소설들은 조금씩 그 색깔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범인의 '의도'와 관련해서 읽을 수 있다. 범인의 의도란 건 결국 범죄의 동기에 관한 것이다. 범죄 자체보다 범인에 대해, 특히 그가 왜 살인을 하게 되었는가, 뭐 이런 것에 관련이 되는 것이다. 우아하게 말해서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고 해둘 수 있을 것이지만, 사실, 그러기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주인공들은 너무 통속적이어서 별달리 인간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많지 않다.) 




미스테리에서  살인 혹은 범죄의 동기로 범인의 의도는 명확히 존재한다. 그에게 반드시 복수하겠어! 이 고비를 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녀의 유산이 필요해! 그 년놈들을 용서할 수 없어! 그만 없으면 나의 과거를 알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등등.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그건 정신이상자의 연쇄살인 내지 사이코패스의 이상행동일 뿐이다. (그리고 범죄 이후의 행동들의 전형적인 의도는 '완전범죄', 그러니까 '아무도 내가 범인인 줄 모를거야' 를 위한 것들이다.) 이 소설집의 소설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난 사실 그/그녀를 꼭 죽이고 싶었던 건 아니야.

7편의 살인에서 살인의 동기는 필연적으로 불타오르는 어떤 것이 아니다. 심지어 선의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7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살인자들은 대부분 (마지막의 트릭소설을 제외하고는) 그저 악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범인을 동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이다. 선과 악의 기묘한 혼합, 세상사 다 그렇듯이 선악이 칼같이 구분되는 경우가 어디 그리 많더냐, 살인자라고 다 나쁜 놈은 아니었던 것이다...이렇게  해두고 싶지만, 사실 그조차도 이미 미스테리의 한 전형인데다, 이 소설들은 딱히 그렇게 인간 그 자체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나비효과, 카오스 이론. 뭐, 이런 걸 떠올리고 연상해도 좋다. 나비의 날개짓이 폭풍을 일으켰다 이거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 사소한 어떤 것.

오히려 이 소설들은 공통적으로 중첩되는 우연으로 인해 도대체 예측하지 못한 결말을 맺게 된다는 점에서 허무하기조차 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을 요약하면 한 마디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라는 것이다.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라는 것은 결국, 세상 만사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오래된 지혜(인간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깨달음!)에 다름 아니다.

거기에 덧붙여  이 소설들이 나아가는 방향이 전형적인 미스테리, 혹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살인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다르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살의까지는 아니었는데, 작은 고의들이 중첩되어 살인이 일어나고, 정말 지극히 우연한 계기가 살인으로 귀결되고, 선의가 좌절을 불러 일으키고, 애정이(치정이 아니라) 살인을 낳고 만다. (혹은 바로 아주 우연한 작은 일로 완벽히 짜여진 살인이 무너진다.) 그래서 결국,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세상은 냉혹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서(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같이 가련한!)거나, 혹은 반대로 살인의, 범죄의 끔찍한 일상성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 소설들이 일정하게 반전을 의도하고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장편에서는 꼼꼼하게 서사의 흐름을 구축하고 감정의 흐름을 만들어서 작가 스스로가 예측가능한 경로를 설정할 수 있지만, 단편의 경우에 반전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의존하게 된다. 살인, 살인의 동기, 범인의 정체, 범죄의 방식에 관련한 고정관념, 상식적 맥락에 기대어 이를 넘어서는 것으로 반전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어찌됐든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다. 역시, 살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살인은 대단한 일이야" 내지는 "살인자는 어딘가 이상한 혹은 특별한(하다못해 동기에 있어서라도) 사람이야"인 것이다. 잘 짜여진 트릭과 퍼즐이 살인에 대한 그런 고정관념을 대변한다면, 여기 이 소설들은 그러한 생각을 비틀어서 사실, "살인은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거야"로 끝내버리는 거다.(지극히 통속적인대로,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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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지금도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해문출판사의 빨간색 표지를 단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문고로 날밤을 꼬박 샌 것이 대체 며칠이었던가. 지금껏 인류가 살아오며 말하고 전하고 쓰고 남긴 많은 것들을 읽고 또 거기에 몇 장을 보태는 사소한 삶을 살고자 한다만, 그 모든 활자들 중에서 단연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칼자국에 피범벅이 된 시체거나, 얌전히 고개를 떨군 독살시체거나, 신원을 알수 없이 얼굴이 뭉개진 시체거나, 불에 태워진 시체거나, 토막 난 시체거나, 무언가 둔탁한 것에 얻어 맞아 쓰러져 있는 시체거나, 선명한 줄의 자욱을 목에 남긴 교살시체거나 등등의 시체들 이야기이다.

나는 네크로필리아가 아니므로 좋아하는 것은 '시체들'이 아니라 시체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시체 '이야기'를 즐기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세계의 무지 많은 나라들에서 채 상상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추리소설을 읽고, 굉장히 많은 작가들이 추리소설을 잘 만들어서 억만장자가 되었다.(이를테면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처럼, 게다가 소설로만 끝나지도 않는다)    


(나를 비롯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범죄와 살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범죄와 살인의 그 기막힌 이야기들은 왜 그토록 재미있을까. 

모두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살인자들이 있다. (어쩌면 신의 뜻에 따라) 최초의 살인을 했던 카인도 있고, 동생과 공모해 어머니와 그 정부를 살해한 엘렉트라도 있으며,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를 목졸라 죽인 오델로에(혹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맥베드 부부이거나 고뇌하는 살인자 햄릿, 셰익스피어의 주요 작품에 예외없이 살인이 등장한다는 점이야말로 기억할만하다) 제 손으로 정의를 만들고자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도 있다. 살인, 그리고 범죄 그 자체라고 한다면, 인간이 땅에 발을 딛고 선 그 때부터 바로 이 순간까지 한시도 인간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정색하고 말해본다면 범죄(와 살인)은 인간 삶의 어떤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것을 극화한다.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선과 악, 죄와 벌, 사랑과 증오, 인정과 배제, 지배와 복종의 모든 것이 그 곳에서 만난다. 그러나 내가 흥미를 가지는 것은 그토록 의미있는 인간의 면면이 아니다. 이 모든 기억해야만 하는 살인자들은 추리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과 추리소설의 살인자들은 닮은 듯 하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추리소설속에 등장하는 범죄와 살인은 이전의 위대한 비극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살인자들은 어떻든지간에 영웅이 아니며, 살인의 전후 맥락, 동기보다 살인 그 자체가 더 중요해진다. 추리소설속의 살인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점증하는 범죄와 살인의 자극은 읽는 이의 불안과 공포를 높여가지만, 동시에 이야기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든다. 되돌아볼 순간을 한 순간도 허락하지 않고 끝까지 몰두해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추리소설속의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공포는, 읽는 이의 개인적인 운명과 철저히 무관한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지는 불안 혹은 공포와 이야기가 그대로 맞닿는 순간, 책장을 넘기는 행위는 고통스러운 고문으로 바뀌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차라리 카프카를 읽는 것이 훨씬 나을 정도로)



그런 점에서 추리소설이야말로 근대사회가 이전의 사회와 어떻게 다른지를 증거해주는 한 실례이다. 추리소설은 범죄와 살인에 순수하게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근본적인 삶의 불안과 공포를 억제해 줄 수 있는 시대를 증거한다. 범죄와 살인의 극적인 경험이 오지의 모험가 혹은 운명을 바꾸기 위해 떠난 영웅이거나 특별한 야심가의 것이 아니라 날마다의 일상적 삶에서 부딪치게 되는 시대에, 하루하루의 삶에서 살아남는 것이 지극히 불안한 시대에 추리소설은 근본적인 공포를 잠시 망각하고 불안에서 벗어나는 기분전환의 오락이 된다.




에드가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은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추리로 살인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최초의 추리소설로 일컬어진다. (물론, 뒤팽의 논리정연한 추론의 결과가 살인자 오랑우탄으로 귀결된다는 점은 조금 괴기스럽기는 하지만.)'도둑맞은 편지(1845) 에서 명쾌하게 드러나듯이, 오귀스트 뒤팽이야말로, 역사상 이어지는 위대한 탐정들의 시조로 손색이 없다. 뒤팽의 가장 위대한 후계자는 아마도, 셜록 홈즈일텐데, 1886년, 코난도일이 등장시킨 셜록 홈즈를 통해 추리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뒤팽과 홈즈라는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가겠지만, 초기의 추리소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수께끼 풀이였다. 범죄와 살인은 꽉 짜인 퍼즐 풀이를 위한 배경을 제공할 뿐이다. 완벽하게 분석적인 사고를 통해 조립하고 분해할 수 있는 퍼즐이야말로 추리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이다. (수수께끼의 풀이는 물론 인간의 본질이다. 따지고 보면
문명이라는 것이 인류가 인간자신과 자연의 수수께끼에 도전해 풀이해 온 역사가 아니던가.수수께끼는 그런 점에서 인간의 운명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기도 하다. 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풀이로 시작했듯이.아시다시피, 추리소설의 수수께끼는 반드시 풀리고야 만다는 점에서 다른 수수께끼, 예컨대, 카프카의 케이가 맞닥뜨리는 수수께끼와 다르다.)




추리소설은, 그야말로, 사람보다 사물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증거한다. 단서는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절차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완벽하게 재구성한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사물들이다. 오히려 사람의 이야기는 변덕스럽고, 부정확하며,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는데 장애가 될 뿐이며. 잘해봐야 사물과 같은 선상에 놓인다.(사건의 해결에 목격자의 증언은 시체가 보여주는 단서이거나 흉기가 보여주는 단서보다 나을 것이 없다.)
 
공포와 불안에 가득한 일상, 온통 불확실성에 내맡겨진 삶의 조건,  눈앞에서 확인되는 계급 간의 치열한 전쟁을 매일 치루어 내는 근대사회에서 살인과 범죄 자체의 풀이에 순수하게 집중하는 것은  근대의 어쩔 수 없는 혼란과 무질서를 구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소설은 오직 근대 이후에 가능한 이야기이며 근대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는 탐침이 된다. 

어찌되었든 간에 훌륭한 추리소설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그래서 아마도 나는 여전히 밤을 새는 날들이 많을 것이다. 다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생각나는대로 발견한 사람과 사회에 대한 짤막한 단상들을 두서없이 이곳에 적어가기도 할 텐데 (게으름을 어떻게 이기고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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