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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16 글쓰기의 어려움(1): 제임슨의 경우 by vinoveri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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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맑스주의 학자이자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주 난삽하고 난해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많은 혐의와 비판을 받아왔다. 말하자면, 비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식인이 배운 티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역사의 발전을 위해 싸운다는 진보적 지식인조차 그토록 어렵게 글을 써야 하는가? 왜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글이 난해하다는 지적이 단지 독자들의 이해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식의 고도로 복잡한, 매개된 글쓰기가 자명한 현실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당면한 싸움의 전선 자체를 흐려놓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국의 또 다른 맑스주의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제임슨의 이른바 변증법적 비평이 첨예한 실제 현실을 외면하고 당면한 싸움을 변증법이란 이름하에 해소해 버린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저 세련된 변증법이 밥 먹여주냐라는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의 거친 진실,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세속적비평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이경덕, <‘세련된변증법이 아닌, 현실에 밀착된 변증법을 향하여>, http://blog.aladin.co.kr:80/mramor/1696117 참조. 거친 사고(plumpes Denken)’당대의 복잡하고 사변적인 맑스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내세운 브레히트의 모토였다. “하지만 거친 사고야말로 현실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거칠게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거친 사고, 그것은 위대한 자들의 사고이다.”(브레히트, <서푼짜리소설> 중에서)) 나아가, 이러한 그의 글쓰기 방식이 결국 진보적 대중운동으로부터 지식인이 고립되어 있는 미국이라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의 상황을 보여줄 뿐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제임슨 또한 이런 식의 비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식의 복잡한 글쓰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해왔다. 그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백지상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계급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문화 등의 상황과 맥락 안에 들어와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맥락을 탈신비화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브레히트가 말하는 거친 사고 역시 과도하게 복잡해진 헤겔주의나 철학적 맑스주의라는 당대적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글 <역사 속의 비평>의 시작 부분에서.)

나아가,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하나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 특히 그가 몸담고 있는 영미의 아카데미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파편화된 현실에 집착하는 경험론적 사고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밀폐된 칸막이로 분할하고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법률적인 것, 역사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을 면밀히 구분함으로써 특정 문제에 함축된 모든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창비), 359-60)이다. 이러한 방식의 사고는 많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양산하지만, 사회생활 전체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는 총체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복잡한 글쓰기는 이러한 자본주의가 낳은 사물화와 파편화, 특히 미국의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학문적 풍토에 대응하기 위한 그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의 글 곳곳에서 행해지는 거의 무차별적인 인용과 전유 내지 이른바 그의 약호전환(transcoding)’ 전략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비록 그에게 많은 프랑스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자의식, 이를테면 스타일에의 의지(will to style)’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점점 고도로 분화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는 오늘날 우리의 학문 풍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사실, 오늘날 대학민국의 제도권 학문의 기본 모델이 바로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미국의 아카데미이다.) ‘통섭이나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 연구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것도 이러한 학문적 풍토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임슨의 주장이 이러한 요구와 다른 점은 분과학문 체계의 해체 자체가 그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여러 간학문적 연구에 대한 요구들이 흔히 보다 폭넓은 지식에 대한 요구, 즉 분과학문적 지식을 넘어선 포괄적 지식에 대한 요구에 그치는 반면, 제임슨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분과학문으로 나눠져 있을 때 볼 수 없는 것, 분과학문으로는 알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앎에 대한 요구라 할 수 있다.

결국 언어적 매개를 넘어선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앎 자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제임슨이 이글턴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그는 이 현실이란 것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끊임없이 보여주고자 한다. 그의 글이 그처럼 복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토질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못 생겼다 욕한다." (브레히트)



(*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블로그의 먼지를 털어내고 이제 다시 활동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예전처럼 힘을 합쳐 활발한 대화를 다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네요.)

 

Posted by vinov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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