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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8 자유, 필연성, 헤겔. (2): 한반도의 분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by vinoveri 4

3.
헤겔이 이 문제를 다루는 곳은 <논리학> 제2권 "본질론"의 제3부 "현실성" 부분이다. 이 부분은 혹자에 의하면 "헤겔 철학의 분수령"을 이루는 곳으로, 헤겔의 중요한 테제인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 혹은 "필연에서 자유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제3부의 제2절의 소제목 역시 "현실성"인데, 여기서 그는 소위 양상 범주, 즉 우연성과 필연성,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해 논술한다. 그는 이를 세 가지 형식에 따라 설명하는데, 이 세 형식은 다음과 같다.

a. "우연성 혹은 형식적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
b. "상대적 필연성 혹은 실재적 현실성, 가능성, 필연성,"
c. "절대적 필연성."

이 세 형식은 각각 "형식적,"  "실재적," "절대적"인 것이라 말해질 수 있는데, 헤겔은 a와 b에서 각각 "형식적" 범주들과 "실재적" 범주들을 통해 이전의 철학들이 가지고 있던 양상범주에 대한 견해들을 비판 - 정확히 말하면, 지양 - 한 후, c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도출해낸다. 즉 "절대적 필연성"이 헤겔의 입장이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헤겔의 생각을 하나하나 상세히 따라가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다만, 필연성과 관련한 헤겔의 입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우연성과 필연성을 추상적으로 대립시킬 때, 이들은 추상적으로 동일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연성과 필연성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우연성은 필연성이 아닌 것으로, 필연성은 우연성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우연성과 필연성을 대립시킬 때, 필연성은 우연성이 되고, 우연성은 필연성이 된다. 그래서 필연성은 우연성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연성은 필연성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우연은 필연이 되고, 필연은 우연이 되어 이 둘은 이제 하나가 된다.

이것이 헤겔의 "절대적 필연성"이다. 필연성은 "절대적"이다. 즉 모든 것은 필연이며, 필연성 바깥은 없다. 하지만 이 말은, 흔히 이 말로 직접 연상하게 되는, 세상에는 그 어떤 우연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연처럼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필연이라는(앞의 글에서 말한, 스탈린주의의 '철의 법칙'), 그런 뜻이 아니다.

헤겔이 이 말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상 지금 말한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즉 세상에는 필연성 밖에 없지만, 이 필연성은 “우연성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성의 형식 안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필연적 과정”(Slavoj Zizek, The Metastases of Enjoyment, 영어본, 35. 이 책은 한글 번역이 좋지 않아 영어본을 인용했습니다.)이라는 것이다.

필연성이 "우연적 형식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보자. <한겨레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정경모의 회고담은 해방 후 단정수립 과정에 얽힌 한 에피소드를 전해준다.

"'태곳적부터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던 조선을 둘로 가르는 단독선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해 오던 사람이 메논 단장 아니오이까. 그런데 1948년 3월 12일 유엔한국위원단 표결에서 그는 찬성표를 던져 결국 4 대 2의 다수결로 단독선거안이 통과됐소이다.
메논의 돌연한 변심에는 시인 모윤숙의 미인계가 주효했던 까닭인데, 이에 대해서는 모윤숙 자신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오이다.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신동아> 1983년 2월호)
메논 자신은 또 뭐라고 하고 있나.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렸다는 것은 내가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메논 자서전> 1974년 런던)
사소한 우연이 어떻게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메논과 모윤숙의 치정 관계는 매우 적절한 일례를 남겨주었노라고, 호주국립대학 매코맥 교수는 말하고 있소이다.(<씨알의 힘> 제9호 1987년 10월)"
(정경모, "길을 찾아서," 야합이 낳은 '반쪽 건국' 중에서(<한겨레신문> 20090614,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0326.html)

사소한 우연이 얼마나 큰 역사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이만큼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례도 잘 없을 것이다. 이 조그만 사건, 모윤숙의 미인계와 그녀에 대한 메논의 개인적 감정은, 흡사 북경에서의 나비의 몸짓 하나가 어느 순간 뉴욕의 태풍을 가져오듯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분단과 그로 인한 대립과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절대적 필연성이 "우연의 형식 안에" 있다는 말은 이처럼 "사소한 우연이 ...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우연의 연속이 바로 역사이고 인간사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헤겔의 절대적 필연성이다.

그렇다면, 이는 법칙이나 섭리 같은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또, 세상 일에는 거시적인 큰 흐름이나 구조적인 힘이 따로 있어서 개인이란 무력한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반대한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절대적 필연성은 우연성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필연성"이다. 이것은 왜 필연성인가? 역사가 우연의 연속이고, 그것의 집적물이라면, 이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성이라 불릴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시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투 비 컨티뉴드...
Posted by vinov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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