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그대의 철학으로 상상조차 못할 것들이 더 많다네, 호레이쇼."
(There are more things in heaven and earth, Horatio,
Than are dreamt of in your philosophy.)
ㅡ 햄릿이 친구 호레이쇼에게 ㅡ
12.3 비상계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의 국민의힘(‘국힘’)은 2016-7년 박근혜 탄핵 때와 달리 빠르게 극우화의 길을 걸으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세력 분열 없이 똘똘 뭉쳐 법리에도 맞지 않는 여러 억지들을 써가면서까지 내란을 부정하거나 윤석열의 체포에 반대하고, 극우세력이 주도하는 탄핵 반대집회에 나가 전광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왔다. (이는 박근혜 탄핵 이후 당이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잘못된 반성의 결과일 수도 있고, 이후 달라질 정치적 지형을 고려한 공학적 포지셔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집권 보수정당이 급격히 우경화하면서 한국에서도 극우가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최근 자주 듣게 된다. 나는 이런 우려 섞인 이야기를 여러 언론이나 미디어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도 들을 기회가 몇 차례 있었는데, 나와 이런 얘기를 나눈 이들은 대체로 이른바 진보적 성향을 가진 지식인 내지 학자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얘기를 듣는 과정에서 나는 이들의 걱정이 좀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 얼마 전에는 한 지인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다 언쟁 아닌 언쟁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 역시 국힘의 극우화가 한국사회에 가져올 악영향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의 생각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박근혜 탄핵 이후 집권한 민주당 정부의 경우, 처음에는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결국 윤석열의 집권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기득권세력이 정권 탈환에 성공한 데에는 당시 정부에 대한 끊임없는 딴지 걸기가 큰 역할을 했다. 나아가, 가짜뉴스까지 퍼뜨리며 여론을 호도하고 정권 불신을 부추기는 우파 세력의 행태는 오늘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및 유럽,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공통적 현상으로서,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후 그 혼란 속에서 권력 획득의 기회를 노리는 우파 포퓰리스트들의 전형적인 집권전략이기도 하다. 지금의 탄핵국면 이후 민주진영이 다시 집권에 성공한다 해도 수구세력이 흩어지지 않은 채 극우적 방식으로 세력을 유지한다면, 정부 정책에 딴지를 걸고 훼방을 놓다가 정부의 조그만 실수를 빌미로 다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상황을 뒤집을 수도 있을 터인데,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국힘의 극우화 전략은 충분히 위협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의 걱정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그의 얘기를 들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은 불리한 전황에서 퇴각하는 적들이 생존전략으로 선택한 고육지책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벌어질 수 있는 일들 중 최악의 것만을 상정하는 극단적인 씨나리오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극우의 포퓰리즘적 발호가 성공하는 경우도 많고, 싸움이란 앞서다가도 방심하는 사이 역전당하기도 하니까 조심하는 것이 맞겠지만, 어떻든 나에게는 그의 얘기가 내란 시도 세력에 분노하며 반감을 표출하는 국민들의 상식적 실감에 어긋나 있는 느낌이었다. (이게 그렇게 위협적인 전략이라면 왜 저들은 진작에 이러한 노선을 채택하지 않았을까?) 또한, 그의 생각이 극우 포퓰리즘이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고 미국의 경우처럼 실제로 성공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얘기는 미국과 같은 나라와 한국의 차이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물질적 토대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의 정세를 누가 더 정확히 판단하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와의 대화를 나중에 다시 되새겨보다가 다른 게 궁금해졌다. 내 생각에 지금의 상황은 반대로 해석될 여지도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내란 자체가 국민들에게 너무 큰 정치적 트라우마를 주었기 때문에 내란을 옹호하는 일은 국힘 입장에서도 정치적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국힘의 극우화는 그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스스로 좁히는 행보로 볼 수도 있으며(민주당이 이와 유사한 과격한 노선을 선택한다면 그걸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유리한 선택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극우의 정치세력화는 국민들의 일반적 정서를 거스르고 있기에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더 커 보인다고 예상할 수도 있다. 더 중립적으로 이야기하더라도, 이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똑같이 고려할 만한데, 그는 왜 정세를 분석할 때도 굳이 부정적으로 해석될 요소만을 부각시키고 향후 상황을 예상할 때도 최악의 씨나리오만을 가져오는 것일까? (물론 그라면 다른 요소들, 다른 가능성들을 검토한 후 그것들을 기각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에게는 이게 프로야구 경기를 볼 때 자신의 응원팀을 과소평가하며 상황을 항상 불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프로야구를 즐기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경기를 볼 때 자신의 응원팀은 항상 불안해보이고 반대로 상대팀은 막강해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심지어 꼴지팀도 내 응원팀과 붙을 때는 전력 이상으로 잘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예전에 프로야구를 즐기던 시기 나의 응원팀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한동안 우승을 ‘밥먹듯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 팀은 언제나 불안한 팀으로, 우승을 다투는 경쟁팀들에 비해 어딘가 약한 모습으로 느껴졌으며, 잦은 실수로 위기를 자초하며 쉽게 이길 수 있는 경기도 겨우 이기는 그런 팀이었다. 그런데 다른 팀을 응원하는 지인들과 이야기해보면 이 팀에 대한 그들의 인상은 내가 느끼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 팀의 모습은 투타의 밸런스가 너무 잘 짜여져 있어서 바늘 하나 들어갈 곳이 없는 그야말로 압도적 위압감을 갖춘 그런 팀이었다.)
보다 긍정적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한데 굳이 부정적 요소를 과대평가하고 상황을 불리한 쪽으로, 그래서 차라리 안 되는 쪽에 서려는 이러한 심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물론 이런 심리는 그의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일 수도 있고, 지금의 경우 극우세력이 갑작스럽게 부상하면서 그것이 주는 위협감에 대한 즉각적 반응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부정적 태도가 그를 포함한 많은 학자 내지 지식인들의 일반적 성향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지식인이라는 그들의 주체위치가 이러한 부정적 태도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지식인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는 대중에 대한 지식인들의 깊은 불신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이 글에서 다른 기회로 미룬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정점에 해당하는 ‘양심’을 다루는 절에는 지금의 논의에 도움이 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여기서 이론과 실천의 대립적 관계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는데, 그는 이것들을 대변하는 두 주체를 각각 ‘판단자’(즉 이론가)와 ‘행위자’(즉 실천가)라고 부른다. 판단자는 인간의 앎이 유한하다는 것을, 즉 인간의 앎에는 언제나 오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주체이고, 행위자는 앎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나서는 자이다. 판단자의 입장에서 보면 행위자는 너무 무모하다. 잘못된 판단에 기초한 인간 행위로 인해 얼마나 많은 비극적 사건들이 일어나는가? 그런데 인간의 앎이 본질적으로 유한하다면, 아무리 이론적으로 점검해도 결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행위자의 입장에서 보면 판단자의 주장은 사실상 행위를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유하자면, 행위자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사업가쯤 되고, 판단자는 이 사업가가 프로젝트에 대한 이론적 자문을 받기 위해 데려온 대학 교수쯤 된다. 교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프로젝트는 이런저런 결함이 있으니까 이를 해결한 다음 실행에 옮겨야 한다. 하지만 결함은 언제나 존재하며 없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업가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어차피 결함을 다 해결할 수는 없다. 결함을 다 해결하고 나서 실행에 나서라는 얘기는 사업을 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일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결함을 해결해나가자. 물론 이에 대한 교수의 반론도 준비되어 있다.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겨난다면 그때는 어떡할 것인가?
“그게 될까?”와 “니가 해봤어?”의 대결. 앎은 애초에 실천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실천과 대립한다. 앎과 행위, 이론과 실천의 극단적 대립 속에서 판단자는 차라리 행위를 포기하게 되는데(그게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판단자가 아닐 것이다), 헤겔은 이를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부른다. 즉 아름다운 영혼은 실천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 안으로, 즉 이론으로 숨어들어간 판단자이다. 그는 실천과 거리를 둔 채 행위자의 결함을 지적할 뿐 행위하지 않는다.
그런데 판단자인 교수는 행위자인 사업가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미묘한 입장 변화를 보여준다. 교수는 애초에 사업이 잘 되게 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기 위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교수는 어느 순간 일이 안 될 이유를 찾는 쪽으로, 차라리 안 될 것임에 베팅하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게 된다. 즉 그는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지 않나?"를 묻는 입장에서 이 사업의 성공가능성을 의심하고("그게 될까?"), 심지어 실패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하는("그거 안 될 거야.") 입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판단자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변증법적 전환에는 오류에 대한 지식인 특유의 두려움이 개입하며, 바로 이 두려움이야말로 부정적 요소를 과대평가하고 사태를 굳이 안 되는 쪽으로 해석하는, 그래서 차라리 지는 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비관주의 내지 패배주의적 심리의 기원이 된다. 애초에 그는 앎의 불완전함을 지적했을 뿐이지만, 나중에 이 불완전함은 그가 일을 하지 못할 이유가 된다. 하지만 사실 앎의 불완전함은 일을 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앎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일을 하면 왜 안 되는가? 그러니까 행위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불완전한 앎 자체가 아니라, 완전한 앎의 상태에서만 행위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오류가 두려워 실천에 나서지 못하는 지식인적 태도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학자적 태도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기독교의 핵심적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다마스커스로 가는 바울에게 빛과 소리의 형태로 죽은 예수가 나타났을 때 바울은 이것이 부활한 예수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물론 자신 앞에 나타난 예수 자체가, 그리고 그의 목소리 자체가 부활의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얼마든지 부인될 수 있다.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환각이었다면? 그래서 바디우는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왜곡될 수 있거나 증명가능한 사실의 범주에 속하는 것"(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현성환 역, 새물결, 89)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의심하는 자에게 진리를 확신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그 어떤 증거로도 회의를 잠재울 수는 없다. 이때문에 바디우는 “어떤 유대인도 히틀러에 의해 학대받지 않았다는 ‘증거’를 무수히 들이대는 박학한 반유대주의자들ㅡ한 꺼풀 벗기면 나치인 자들ㅡ과”(89. 볼드 강조는 인용자)의 논쟁을 거부한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제시대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들, 혹은 광주항쟁을 북한이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이들과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역사적 진실은 증거의 문제가 아니며, “유대인 학살이나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활동”(88)에 대한 기억과 증거를 들이밀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이 경우 저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반대 증거를 제시하며 논란의 수렁 속으로 끝없이 우리를 끌어들일 것이다).
진리는 앎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앎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출현”(91)한다. 즉, 진리는 앎으로부터의 비약을 요구하는, 일종의 내기이다. (바디우는 이를 “사건에 의해 열린 가능성에 대한 순수한 충실성”(90)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이 내기로서의 진리가 앎과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행위자의 실천 또한 그 자체로는 일면적이며, 맹목적 실천이 가져온 비극에 대한 판단자의 통찰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의심을 포기한 맹목적 실천가의 말로는 음모론일 뿐이며,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지금 아스팔트 우파들의 행동에서 목도하고 있다. 따라서 행위자 역시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판단자와 화해해야 한다. 행위자의 결단과 내기는 앎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행위자의 앎은 비관주의에 기초한 판단자의 앎과 다르다. 행위자의 내면은 당장 매출을 올리지 않으면 가게가 망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아야 하는 자영업자와 유사하며, 따라서 그의 앎은 일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데서 만들어진다. 그의 앎에도 구멍이 없지 않겠지만, 행위자는 이 구멍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 구멍은 메워야 할 대상일 뿐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학자가 아름다운 영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의심과 증거의 포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학자들은 원래 의심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사람들이며, 히스테리증자처럼 끊임없이 의심하고 증거를 요구하는 태도야말로 학자들의 최고의 미덕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동시에 악덕임을 명심해야 한다. 베버적 중립성으로 위장한 관찰자적 태도로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들이 진리에 내기를 걸고 그것에 뛰어들 때, 그래서 이론적 태도에서 실천적 태도로 주체 위치를 전환할 때, 그때에만 그들의 앎 역시 진정한 앎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학자는 어디에 내기를 걸 것인가?***
*내가 이 글에 등장하는 한 지인과 대화를 나눈 후 이 글을 처음 구상한 시점은 윤석열의 체포와 극우세력의 지방법원 난입 이전이었다. 그때는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랐다. 내란 세력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여전히 높았고 이 기세로 탄핵소추안 가결에 성공했으며, 아직 전광훈을 비롯한 아스팔트 우파의 본격적 결집은 이루어지기 전이었고, 다만 윤상현 등 몇 명의 국힘 의원들이 전광훈 집회에 참가하는 정도였다. 아래 글에서 언급되는 정세가 아스팔트 우파보다는 국민의힘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며, “고육지책”에 대한 언급 역시 원내 세력인 국힘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지금의 상황은 그때보다 나빠졌다. 아스팔트 우파들의 거리 진출이 본격화되었고 이들의 난폭한 시위와 법원 습격 등으로 극우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가 높아졌으며, 국힘의 세력 결집이 극대화되어 그들의 지지율이 급상승한 시기이다. 글을 쓸 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그때보다 극우세력의 준동이 더 심각해진 상황이지만, 극우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지금의 우려가 좀 지나친 것이며 이와 관련된 기득권세력의 움직임을 불리한 전황에서의 고육지책으로 봐야 한다는 내 생각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어서 시의적인 것과 관련된 글임에도 별다른 수정없이 그대로 내보낸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아름다운 영혼은 모든 행위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비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행위라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미 하나의 관점을 전제해야 하는바, 관점에 대한 이러한 선차적 선택 자체가 이미 하나의 행위인 것이다. (”베팅”이라는 지금의 표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진정한 행위, 즉 "행위 발생의 맥락을 규정"하는 상징적 행위는 실제 행위 이전에 일어난다. "가장 중요한 행위는 모든 행위 이전에 이미 일어나 있다. ... 사회에 대한 모든 기술description은 언제나 또한 규정적prescriptive이다." J.M. Fritzman, "Surprised by Geist: Hegel's Dialectic as Fish's Artifact," Journal of Speculative Philosophy, vol. 23, no. 1, 20009, p. 58.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역, 인간사랑, 2002, 359-60도 참조할 것.
***<첨언>마침 나는 지금 다른 몇몇 지인들과 칸트의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를 읽고 있다. 이 책 1부에서 칸트는 나쁜 마음(’근본악’)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착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논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나쁜 마음뿐 아니라 착한 마음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 착한 마음의 칸트적 이름은 물론 '순수 실천이성'이다. (흥미롭게도, 인간을 이처럼 선악이 공존하는 이중적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그의 인간학적 입장은 불성 내지 여래장을 내세우는 대승불교, 특히 <대승기신론>의 그것과 유사해진다.)
그런데 사람들과 이런 식의 도덕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주로 부정적인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칸트가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착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을 같이 읽을 때면, 그들은 어떻게든 인간이 그렇게 도덕적이지 않다는 증거를 열심히 제시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윤석열이나 김건희 같은 인간을 보고도 인간이 선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식이다. 그렇지만 반대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도 많다. 예컨대 광화문에서,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모인 사람들이 그렇다. 하지만 칸트가 인간의 착한 마음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사람은 그렇게 착하지 않다는 증거를 열심히 제시하려고 한다. 중립적으로 말하더라도 인간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존재임을 말하는 증거만큼이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도 떠올리고 제시할 만한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여기에도 차라리 지는 쪽에 서는 것과 유사한 심리가 작용하는 것 같다. 즉 그것은, 인간이 원래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면 착하게 살아야 하기에, 인간은 그렇게 착한 존재가 아님을 어떻게든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착하게 살겠다고 하는 선언을 회피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증상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헤겔은 “시종은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것은 영웅이 영웅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시종이 시종이기 때문”이라는 독일 속담을 좋아해서 여러 번 인용한 바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말해보면, 착하게 살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를 선언하기 전까지는 사람이 원래 착하지 않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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