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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항구' 주인이 도선사 역할도 못 한다니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09..22 10:05 ㅣ최종 업데이트 09.10.22 10:43 정대진 (whoami78)

"한국 외교의 지렛대는 남북관계에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이 우리나라 외교관들 만나면 물어보는 게 북한에 대한 정보나 김정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 외교관들이 할 말이 없다면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거죠."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말이다. 얼마 전 열린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의 남북경협법률아카데미 개강 특강에서 나온 얘기다. 그날 이 전 장관은 작심한 듯 예정시간 저녁 8시 30분을 훌쩍 넘겨 9시 반이 다 돼서야 강의를 마쳤다. 그간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한국 외교의 지렛대로 남북관계를 제시한 대목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 우리 남한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이를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도선사론'이라 할 수 있겠다.

 

큰 항구에 가면 '도선사(pilot)'라는 직업이 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배를 만나 물길을 안내하는 직업이다. 낯선 나라의 낯선 항구에 들어가는 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 나라의 물길과 항구 사정에 밝은 도선사가 있어야 배는 안전한 정박을 할 수 있고 다음 항해를 준비할 수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해야 할 역할이 바로 이 도선사이다. 우리는 북한이라고 하는 아직은 낯설고 폐쇄적인 국가에 접근하는 주변국의 외교정책을 안내해야 한다. 한반도라는 항구에서 외국 배가 잘못 위치를 잡거나 자기 마음대로 오고가면서 엉망진창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가 새로 출범한 올해 북미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출렁이고 있다. 이 때 대한민국은 도선사로서 미국이라는 배가 한반도에서 어떻게 항해를 해야 안전하고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한반도라는 항구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한다.

 

올 들어 한반도라는 항구 안에서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하고, 미국에게 "핵군축을 하자"고 하기도 하며, 같은 항구에 사는 "남한과 전면적인 대결도 불사하겠다!"고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여기자를 풀어주겠다며 클린턴 전 대통령을 불러들여 김정일이 활짝 웃는 낯을 전 세계에 드러내기도 했다. 또 중국 총리를 초청해서 "대화하겠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나라는 북한과 미국, 중국 간의 교신내용도 귀를 쫑긋 세워 파악하면서 도선사로 외국 배에 올라타 길안내를 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라는 항구의 주인으로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려면 외국 배에 도선사로 올라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우리가 북한 사정에 정통해 있어야 한다.

 

한반도라는 항구에서 우리의 역할은?

 

현재 한반도라는 항구는 말하자면 철책을 치고 남항과 북항이 있는 꼴이다. 남항은 물자도 풍부하고 외국 배들도 많이 왕래하며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북항은 폐쇄되어 항상 굶어죽기 직전이다. 살기 힘드니까 자기네 안 도와주면 쏴버리겠다며 미사일을 개발하고 핵을 무기로 삼아 협박을 일삼는다.

 

남항과 북항을 가로지르는 철책 너머로도 도발을 할 수 있다며 끊임없이 긴장을 조성한다. 살기 힘드니 죽기 살기로 엉겨 붙는 꼴이다.

 

상대가 이렇게 나올 때는 원하는 게 뭔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직접 대화를 하고 같이 살 길을 모색해봐야 한다. 물론 철책 너머로 좀도둑들이 내려오려고 할 때는 잘 훈련된 사나운 경비견들이 사정없이 물어뜯어 다시는 넘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이는 자랑스러운 정예 국군의 역할이다. 우리의 국군은 수십 년간 잘 훈련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이런 힘을 자신감으로 해서 철책 너머로 땡강 부리는 자들과 호기롭게 대화를 해야 싸우지 않고 그들을 이길 수 있다.

 

제 풀에 지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서 제 풀에 지칠지 안 지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제 풀에 지쳐 쓰러질 거라 기대하면서 막상 외국 배에 올라탄들 할 수 있는 소리가 뭐 있겠는가. 그냥 기다리라고만 할 것인가.

 

도선사로서 한반도라는 항구의 주인노릇을 하고 싶다면 외국 배에 올라 북한이 생각하는 게 이러이러한 것이고 지금 외국 배가 한번 안전하게 북쪽 항에 배를 대주면 위험한 도발이나 무기개발을 거두겠다고 하니 이러이러한 길로 정박을 시도해보라고 권고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먼저 설득하고 항구를 열도록 할 줄도 알아야한다. 그걸 적극적으로 나서서 할 수 있는 건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항구에 사는 우리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건설회사 사장을 해봤으니 잘 알 것이다. 근로자들과 직접 대화를 하고 회사가 큰 손해 안보는 범위에서 애로점을 개선해주는 현장과 일단 대화도 안하고 분위기만 살벌한 현장의 생산성 차이를 말이다. 그러니 대화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적십자 대화나 남북 당국대화의 물꼬가 트이고 있는 듯하다. 정동영 의원이 지난 20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베이징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소식이 전해진 직후 현 정권의 핵심 실세와 김 부장간의 비밀회동설이 돌기도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물밑채널이라도 작동해서 남북이 대화하고 있다면 다행이다. 도선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김 부장의 동선을 노출하는 전략적 행동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남한 정부를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속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압박이 가능한 이유를 생각해보라. 지난 일 년 간 현 정부가 얼마나 남북대화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허약한 면역체계를 보였으면 이런 압박도 가능하다는 해석이 나오겠는가. 그러니 더욱 당당하게 도선사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정권을 잡고 일 년 넘게 해보니 다시 깨닫는 것도 있을 것이다. 왜 지난 남북정상회담이 당국 간 비밀회동에서 시작되고 외교라는 게 필연적으로 물밑채널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지 말이다. 그러니 솔직히 인정하고 야권이 지난 10년간 쌓아올린 노하우와 네트워크도 활용하는 열린 자세를 보여야 한다. 물론 야권도 이에 대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남북관계는 정략의 대상이 아니다.

 

도선사 역할 제대로 못하면 앞으로 할 말 없어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그 발표시점을 놓고도 말이 많았다. 총선 직전의 발표를 놓고 당시 야당이었던 현 집권당은 "정략적"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총선에 남북정상회담 성사 바람을 활용하려는 음모라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총선 직후에 남북정상회담을 발표했으면 어떠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총선에 불리할까봐 일부러 늦게 발표했다며 역시 "정략적"이라고 맹공을 퍼부었을 것이다.

 

남북관계와 한반도의 미래는 이런 식으로 정략의 이용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승적으로 이 점을 인정하고 현 정권은 야권에게도 남북문제와 도선사 역할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거하면서까지 조문정국을 통해 남북 고위당국자 비공식 대화라는 선물을 남기고 갔다. 그간 일구어놓은 네트워크의 힘이었다. 여권은 이 힘을 인정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솔직한 지원을 구하고, 야권도 대범한 자세로 적극 협조해야 한다. 예전에 "정략적"이라고 맹공을 당했다고 "너네도 한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비협조적인 자세로 나오면 안 될 것이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출범 직후 정파를 초월해 지금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된 보즈워스 전 대사를 비롯한 북한 전문가 그룹을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한반도 항구의 주인인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랜드 바겐 정책에 대해 미 국무부 관리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고, 남북정상회담 관련 이야기가 미국 관리 입에서 나왔다가 "서로 오해가 있었다"며 덮고 가는 석연치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올해 초 캐서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가 한반도 정세에 대해 "솔직히 현재 미국이 할 일이 뭔지 모르겠다"라고까지 이야기했다. 한반도 항구의 주인인 우리가 도선사 역할을 제대로 안 했으니 갈 길을 모르겠다고 하는 소리다.

 

항구의 주인이 도선사 역할도 못한다면 배가 마음대로 들어와도 할 말이 없다. 깊이 생각할 일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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