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B. Pippin, "The "logic of experience" as "absolute knowledge"", In :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 Ed. Dean Moyar & Michael Quant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pp.2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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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헤겔이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철학적 형식인 <정신 현상학>(이하 <현상학>)을 규정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너무 많은 기술記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기술들은 명백히 다른 기술들에 대한 재정식화 혹은 상술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경우들에서는 기술들이 서로 비일관적이거나 그의 (1802년에서 06년 사이 예나에서 빠르게 진화한) 사유 속에 있는 서로 다른 시기를 반영하는 듯 보인다. 현상학은 본래 “의식 경험의 학”이었다. 그는 이를 “정신의 현상(론)에 관한 학문the Science of the Phenomenology of Spirit”이자, “학문의 체계”에 대한 “서론”으로 명명했다. 그것은 또한 그 체계의 1부를 이룬다. <철학적 학문들의 백과 요강>(이하 <철학백과>)은 <현상학>을 “의식의 학문적 역사”라고 부른다. <현상학>안에서 헤겔은 이 저작을 “영혼의 도정道程”이라고 부르며, 이 길은 “영혼 자신의 본성이 마치 스스로에게 지정한 역驛들과 같은 영혼의 형태들을 거쳐”가며, “이를 통해 영혼은 정신의 삶을 위해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게 되고 그 자신에 대한 완전한 경험에 의해 자신이 실로 즉자적으로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데 도달”한다고 말한다(¶77). 잘 알려져 있듯 헤겔은 <현상학>이 “회의의 길”이자, 실로 “절망의 길”이며 그 점에서 “의식 자신이 학문의 입장에 이르는 구체적 도야의 역사”라고 말한다(¶78).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서문” 및 “서론”의 시작부에서 별안간, (위에서 언급되었듯) ‘체계의 서론이자 1부’, ‘자기순화’, ‘정신의 자기 앎’, ‘자연적 의식 도야의 역사’인 어떤 것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될 뿐만 아니라, “앎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신의 통찰”(¶29), 학문의 입장에 도달하는 “사다리”(¶32), 정신이 “부정적인 것과 직면”하여 “그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는” 길의 기록(¶32), “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하지만 ... [그 술판의] 참여자 각각은 거기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붕괴해버리고 만다━ 바쿠스적 흥청거림”인 “진리”에 대해 이해하는 길(¶47) 등에 해당하는 것으로도 이끌려 들어가며, 회의와 절망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함으로써 이 모든 것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211] “서문”에 나오는 약간 더 평범한 이미지 ━이는 철학에 대한 헤겔의 독창적이며 본래적인 기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인바━에서 헤겔은 <현상학>이 우리 자신의 시대에 특별한 필요를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것은 바로 “보편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그것에 정신적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33)이다. <현상학>은 “규정된 사고를 그 고정성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이를 수행한다. 다시 말해 “고정된 사고를 유동적 상태로 가지고 와”서 “순수 사고를 정신적 본질인 개념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진지한 독자들은 오래되었지만 상대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문헌학적 문제들과도 직면하게 된다. <철학백과>에 속한 “현상학”이라는 대안적이며 축약된 판본의 문제가 잘 알려져 있으며,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의 학생들을 위한 ―“예비학”으로서의― <현상학>에 대한 헤겔 자신의 요약도 존재한다. 이 두 요약본 모두 “현상학”을 “이성” 장으로 끝맺고 있다. 이는 잘 알려진 다음 두 가지 문제에 관한 끝없는 질문을 야기한다. 곧 출판된 저작에서 역사적 정신과 종교를 다루는 [장의] 역할 문제, 그리고 한편으로 서론 혹은 예비학이면서도, 다른 편에서는 [자신의 전체 철학 체계 중] “주관정신” 철학의 2부가 되는 “현상학”의 체계적 위치 문제가 그것이다. 또, 텍스트의 의심스런 통일성 혹은 불완전성에 관련되는 문제―이 저작을 고쳐 썼다는palimpsest 등의 의심이 있다―나, 헤겔 스스로 자신의 체계 및 그 도입에 관해 마음을 여러 차례 변경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에 관한 복잡한 문제들 역시 존재한다.
이 모든 문제들에 직면하여 나는 이 책에 관해 상대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적은 네 가지 주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네 가지 주장들 모두는 내가 추적하고자하는 물음을 곧바로 제시해 줄 것이다. 첫째, 이 책은, 자신의 소행, 세계, 그리고 타자에 관련한 초기의 자기이해 방식―헤겔은 이를 “의식” 또는 “자연적 의식”으로 명명하며, 간혹 “지성”의 관점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과 정신에 도달한 자기 이해를 분명 현저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좀 더 전통적인 철학 용어로 말하면, 후자는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된다. 곧 이 이론은 ―데카르트적인 내면성이나 칸트의 초월론transcendentalism, 기독교적 이원론 그리고 칸트적인 자기-원인적 개별 행위작인self-causing models of individual agency 모델에 맞서― 사실과 사건들에 대해 마음을 정하고 행위하기로 결단하는, 인식 및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이론이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분명, 이 같은 ‘주체성 개념의 [새로운] 계승자가 달성하는 정신이란 무엇인가’이다. 하지만 그의 핵심적 주장이 책의 첫 세 개 장章이 끝나는 데서야 도입된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거기서 헤겔은 “이와 더불어 우리는 이미 우리에 대해 정신의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나’인 ‘우리’, ‘우리’인 ‘나’'I' that is ‘We’ and ‘We’ that is ‘I’”라는 그 유명한 최초의 정의를 제시한다(¶177).
둘째, ―<현상학>이 [헤겔 체계 상] 그 무엇이 되든 간에― 정신에서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자기-앎이 달성되며 [212] 또한 정신이 사회적 성격sociality을 지닌다는 것에 대한 <현상학>적 근거제시 방식으로서의 <현상학>의 논리는 넓게 말하자면 연역적이거나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발전/전개적developmental이다. 적어도 뒤따르는 부분들은 선행하는 경과서 드러나는 바에 의존한다고 상정된다. 특히나 [한편으로] 한 부분에서 유지되는 관점의 부적합성이나 일면성에 의존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 관점에 대한] 일종의 개선 및 수정 혹은 그 관점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하는 관점에 의존한다.
어떤 해석자들은, 이러한 발전 논리란 실제로는 일종의 이야기이며, 그 논리 혹은 그 정렬 방식의 일관성은 ―언제나 자기의식적 전제들만을 항상 논리적 일관성에 따라서만 취급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교양소설의 논리에 훨씬 가깝다고 까지 주장했다. 이는 분명 너무 많이 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은 정신의 전개 혹은 자기실현이 이성적 과정임을 주장하려 하기 때문이다―비록 헤겔이 그러한 이성의 “생동하는” “유동적” 형식을 고집스레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 전개 및 자기실현이 처음에는 보다 극적劇的이거나 문학적인, 이야기 전개에 관한 개념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라고 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이 사실이라 해도 말이다.
셋째, 이 모든 것을 추동하는 “동력”은 가장 광범위하게 말해 “부정”이다. 더 구체화하면, 특정한 종류의 자기-부정이다. 헤겔은 자연적 의식이 그 자신의 손에 일종의 “폭력”을 겪는다고 말한다. 이 폭력이라는 이미지는 어떤 관점, 세계에 대한 지향, 자기이해 또는 [관행적] 실천을 체화하고 있는 주체에 가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이 주체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원칙이나 신념에 (어떤 이유로 인해 명백히 불가피하게) 불만족을 만들어냄으로써create 생겨난다. 그러한 불만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아무 이야기 속 주체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학대self-inflicted)이다. 거의 책 전체를 하나의 정식으로 압축하고 있는 “서문”에서 헤겔은 “자신과 달라짐(Sichanderswerden)과 자기 자신 사이의 매개”를 언급하며, 종종 그러하듯 진정한 인간적 주체성을 “순수하며, 단순한 부정성”(¶18)으로 규정한다. 전개해 나가는 정신의 본성과 이 자기-부정적 특성이라는 두 개념은 <철학백과>에 나오는 정신에 관한 규정―이는 정말 자주 나오며 또한 매우 역설적이다― 인 [정신은] “자기 자신의 산물[이다]”이라는 말에서 결합되며, [그렇게 결합된 내용은] “정신은 ... 본질적으로 결과”라는 주장(¶20)의 토대가 된다.
넷째이면서 가장 중요한 주장은, 헤겔은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불화’가 분명 오늘날 우리가 "비판적 반성"이라고 간주하는 것과 다르다고 한다는 점이다. 곧 이러한 불화는 검토되지 않은 가정을 검토하고, 아무것도 당연시 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다른 이가 이끄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등등에 해당하는, 일반적으로 말해 ‘자신이 신념으로 갖는 규범이나 원리에 관해 반성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지를 보고자 하는 시도’ 같은 게 아니다. “서론”에서 헤겔이 간략히 논하듯, 비판의 시도들 모두가 [나중에 <현상학> 전개에서 입증되듯] 자신이 옳다고 설교하는 내용에 정확히 반하는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반성을 시도하는 어떤 특정 시도도 어쨌거나 [시도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무반성적인 것을 기준이나 척도로 체화하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어떻든 <현상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213] 이 같은 비판적 반성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헤겔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상학>의 이야기는 적어도 일차적으로 마치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처럼 삶이나 문화가 지닌 점점 더 많은 것을 “검토”하는 유의 교훈적 이야기가 아니다. 이와 가장 관련이 깊은 “서론” 구절들에서 헤겔은 우선 자기 책에서 다루는 “회의懷疑”란 통상적인 회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통상적 회의 개념에 대해 그는 “이런 저런 전제된 진리에 관해 좌고우면하는 것”(¶78)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러한 통상적 회의 대신 [자신의] “이 철저한 회의주의”를 언급면서 “그 자신의 상실”(같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길을 잃는 경험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계몽의 실천적 신조를 규정하기 위해 칸트가 사용한 “알고자 하는 용기를 가져라(=감히 알고자 하라; sapere aude)” 같은 말에 정확히 대립되는 것이다. 루드비히 지프Ludwig Siep 같은 해석자들이 보기에 이 차이는 헤겔이 의존하는 “경험”이 지닌 의미 차이에 상응한다.* 비판적이며 반성적인 [경험의] 의미는 잘못된 믿음을 수정하고 진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경험”에 기초하여 더 좋은 근거를 가진 믿음으로 바꾸는 일을 가리킨다. 헤겔이 의지하는 더 극적인 [경험의] 의미는 종교적 경험 혹은 정치적 탈바꿈이이라고 간주되는, 의식의 완전한 전복顚覆 혹은 개종conversion에 훨씬 가깝다. 나는 헤겔이 후자의 “경험”을 고려하는 것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문제가 놓여 있다. 정확히 이 후자의 경험은 분명 대부분 경우 아무런 “로고스”도 설명도 없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매우 광범위하게 다양한 이유로 인해 그런 종류의 경험을 겪는 듯 보인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우리 스스로 이런 일을 일으키며 이런 의미를 지닌 경험에 관한 학문이 존재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해 실로 집단적인 합목적적 활동의 부분으로서 이런 종류의 경험에 대한 “논리(학)”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반직관적인 듯 보인다.**
* Siep (2000), 63–64.
** 이 경험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과 이 경험이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연관은 칸트적인 근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적 근대성은 이성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만을 가장 잘 알며 이성은 그 자신만을 안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정신에 관한 물음은 반성적 개인 및 자기-원인적 행위자와 대조를 이루는 사회적 성격의 위상에 관해 묻는 것이며, “살아있고”, “운동하며”, “유동적인” 개념들을 향한 이성적 발전의 형식인 전개 논리의 본성에 관해 묻고, 또한 말하자면 피학적인 자기-부정 개념에 관해 묻는다. 나는 마지막 질문이 다른 질문들을 바라보기 가장 좋은 창窓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헤겔이 현상학적 발전의 본성을 서술하기 위해 여기서 절망에 이를 정도의 자학적 회의를 불러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회의가 “내 믿음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라는 의심도 “내가 제기하고 있는 규범적 주장을 할 만한 자격을 내가 진짜 갖추고 있는지”와 같은 의심도 아니라면, 도대체 저 회의/절망은 어떤 것인가? 정신이 직면한 문제―이 문제는 또한 <미학 강의>의 시작부에서 매우 일반적 방식으로 다시 언급된다―를 기술하기 위해 헤겔이 <현상학> 한참 뒷부분에서 사용하는 또 다른 강력한 이미지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214] 정신 혹은 인간 실존 자체가 (A) 스스로 낸 상처이며, (B) 정신 스스로가 치유할 수 있는 상처이고, (C) (훨씬 더 놀라운 것은) 치유하고 나면 흉터가 남지 않는(¶669) 그러한 “상처wound” 같은 것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다른 말로 해보자.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종종 “상象”에 “사로잡힌” 혹은 “붙들린” 존재에 대해 언급한다. 헤겔이 다루고 있는 듯 보이는 문제는 바로, 정신의 형태 혹은 “상”이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것, 곧 그것이 더 이상 충성을 명하지 못하며 어떤 면에서 실패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모두 단지 사회학적이거나 역사적인 설명만이 아니라 철학적인 설명에도 개방되어있다. 실제로 헤겔은 그러한 과정으로부터 철학적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이 상실의 경험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심지어 흉터도 남기지 않을 만큼 잘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는 그 중 가장 거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요한다. “절대지”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째서 흉터 없이 실존 그 자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현상학> 자체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현상학>자체에 대한 “메타-현상학적인” 여담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며, 말하자면 탈-신화화하는 작업, 곧 “상처”, “자학”, “치유”, “흉터”, “유동성”, “얼굴에서 죽음을 봄”, “폭력” 등의 개념을 덜 비유적이며 더 단조로운 개념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요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하에서 간략히 수행하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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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적으로 다루어야만 하는 해석적 문제가 있다. 내가 인용했던 말들은 매우 극적이며 “정신의 형태”에서 발생하는, 아마도 아테네 비극 혹은 프랑스 혁명에서 현시되었던 것과 같은 일종의 실존적인 실패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상학>에 나오는 다른 수많은 이행은 그런 실패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 듯 보인다. 이점에 관해 [“의식”에 속하는] 맨 앞 세 개의 장을 떠올릴 수 있으며, “이성”장의 다수의 이행들 역시 그러하다. 지각적 구별이 지성의 능동적 작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나 “골상학”이 자기-논박적이라는 것 등을 깨닫는 일은 어떤 식으로도 ‘대담하게 죽음과 대면’한다거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는 것’과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며 절망이나 종교적 개종과도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제안하는 바는, 헤겔이 분명 <현상학>에 의해 정립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문을 품고 있었으며, 그는 이 두 질문이 서로 분리되어 제기되어야 정신이 현상학적으로 이해되어야하는 까닭이 무엇인지와 정신이 현상학적으로 이해된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즉 헤겔은 [이전 장章들과 비교할 때] “정신”장 이후부터 훨씬 더 역사적 현실성에 결부된 접근법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215] 다른 말로 하면 [한편으로] 인식 및 행위하는 주체성의 가능한 모델들이나 그러한 위상을 갖는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들―이들은 가능한 경험을 수행하는 주체의 매우 파편화 되어있으며 부분적인, 그리하여 왜곡된 “형태들”로서, 실제로는 어떤 경험의 모델로도 가능하지 않다―에 관한 질문과, 다른 한편으로 “정신의” 역사적 “형태”―이 주체는 이제 경험의 온전한 주체로 간주되기에 충분한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되지만, 바로 이점에서 그 자신의 만족의 허무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에 의해 경험되는 온전한 의미에서 (헤겔이 말하듯) “현실적인” 자기-해소적(sich-auflösende) 경험에 관한 질문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가능한 경험의 모델이 되는데 어쨌거나 실패[하는 주체]와 자기 신념의 달성 또는 실현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을 경험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는, 현실적으로 경험을 수행하는 주체를 이와 같이 구별하는 것은 엄밀한 구별이 아니며, 인정컨대 텍스트의 어떤 부분에서는 헤겔이 이 가능성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몇몇 부분들에서 정신적 생명/삶 및 개념의 유동성에 대한 호소가 인식론적 입장 및 자유에 관한 이론적 입장들의 다소간 억지스런 “의인화”로 이어져, 각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논쟁을 주고받게 만드는 듯 보인다. 그와는 달리 프랑스 혁명이나 라모의 조카에 대한 설명과 같은 다른 부분들에서는 말하자면 실존적 논리에 의존하거나 혹은 다른 종류의 불충분성 및 실패 입증에 의존하는 듯 보인다. 또 다른 부분에서는, 위 두 가지 전략이 함께 사용되는 바, 그 예로 주인의 역설은 개념적 역설(강요된 인정은 인정이 아니다)이자 (더 나은 말 없어 그냥 말하자면) 실존적 역설━ 내가 인정하지 않는 이가 [나에게] 제공하는 인정에는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떤 점이 존재한다━이다.*
* 이 지점에서 어떤 비판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아마 당신이 제안하고 싶은 대로, 실제로는 <현상학>이 다만 6장에서부터 진정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더라면, 그는 그렇게[6장에서 시작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해] 나는 어떤 면에서는 그게 바로 그가 주장한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보면, 이는 헤겔에서 낯선 논증 방식이 전혀 아니다. <법철학>에서 추상법과 도덕성은 나중에 윤리/인륜성으로 드러날 것을 향해 나아가는 구별되는 경험적 단계들도, 또 그것에 대립하는 편향적 대안들도 아니다. 그와 같이 제한적인 규범적 정신mindedness의 형식들(이라고 추정되는바)이 겪는 실패는 정확히 그것들이 윤리/인륜성에 독립적으로 선행한다는 듯이 생각하는 불운한 시도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관점과 달리 헤겔이 "도덕성"장 마지막에서 말하듯,
법/권리의 영역과 도덕성의 영역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들은 윤리/인륜적인 것을 그것들의 버팀목이자 토대로 갖는다.*
[216] 이성적 삶의 형식 속에서 개별성과 보편성의 관계가 지닌 풍부하며 생동적인 의미는 실로 가족이나 근대 시민사회의 경험에서 현실적으로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면에서 보면 이 앞선 단계들은 “현실적으로” 형성적이거나 교훈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추상법적] 인격”, “[도덕성의] 주체” 그리고 윤리/인륜성의 구체적 측면들 간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헤겔은, 권리의 담지자(라고 간주되는 자)를 “인간”으로 지시하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은 비로소 ‘윤리/인륜성에 대한 설명’에서, 곧 (필요욕구들의 특정 관계인) ‘사회성의 독특한 형식 속에서’라고까지 말한다.** 이는 말 그대로를 의미하는 듯 보인다. 곧 순전히 [추상]법 혹은 도덕성에서의 관계들로 상정되는 것은, 그들 자체로만 고려될 때 온전히 인간적 관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Hegel, <법철학>, §141 A.
** Hegel, <법철학>, §190.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 6장 세 번째 단락에는 이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정신은 자기를 지탱하는selbsttragende 절대적이고 실재적인 존재이다. 이전의 모든 의식 형태는 이 정신의 추상적 형식들이다. 정신이 자신을 분석하고, 자신의 계기들을 구별하여 그 계기 각각에 잠시 머무른다는 점에서 이 추상적 형식이 생겨난다. 이러한 계기들을 따로 떼어내는 것은 정신을 전제로 하며 정신에서 존립한다. 즉, 고립[역주: 고립된 형태들]은 구체적인 실존인 정신에서만 실존한다.*(¶440)
우리는 여전히 정신이 어떻게 “자기를 지탱할” 수 있는지, 뿐만아니라 이때 어떻게 자기 부정 또는"자-해"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당분간은 따로 있을 수 있는 경험 모델들이라고 추상적으로 간주(되지만 결국 정신의 불가분적인 계기들로 판명)되는 것들을 분석하는 일과, (헤겔이 계속해서 말하듯) 정신이 자신에 대해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 사이에서 헤겔이 분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주목해야한다. 여기서 헤겔은 실천이성을 그 같이 고립된 방식 속에서 개별 주체의 능력으로 간주하려는,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시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점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정신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이성을 현존하는 [역주: 독일어 원문은 “존재하는”] 이성으로, 곧 정신 속에 있으면서 현실적인 것이자 그 정신의 세계인 이성으로 직관할 때, 정신은 그 자신의 진리 속에 실존하게 [역주: 독일어 원문은 “존재하게”]된다. 바로 윤리/인륜적 본질인 정신이 현실적 현존재를 갖는 것이다[역주: 독일어 원문은 “정신은 정신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윤리/인륜적 본질이다”] .(¶440)
또 다른 매우 이상한 정식은, ‘이성을 가진 주체로부터 스스로를 이성이라고 이해하는 주체로의 이행’이라는 정식이다. 그러나 책에서 이러한 단절을 다루는 다른 많은 정식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정식 역시 말하자면 정신의 가능성을 위한 구성 조건들로부터 현실적 정신이 자신을 알고 실현하려는 시도로 이행한다는 것이며, 여기서 핵심 문구들은 “현실성”, “현실적”, “현실화”에 관련된다. 그러한 강조는 “종교”장의 시작 부분에 있는 중요한 메타-현상학적 언급에서도 이어진다.
“종교”장 시작부에서 헤겔은 현상학적으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표상되어야 하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별한다. [217] 위에서 언급 한 구분과 거의 비슷하게, 헤겔은 “정신”장** 안에서 의식, 자기의식, 이성 계기들이 “현전”한다는 것이나 “정신”장에 나오는 종교 속에서 정신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의미를 표상하는 것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표상될 수 없다”고 상당히 분명하게 말한다(¶679). 이것은 경험의 요소들 및 경험의 가능성을 고려하는 오로지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헤겔은 경험의 요소들[의식, 자기의식 등 “정신” 장 이전에 나온 정신의 구성요소들] 및 경험의 가능성을 (비록 그들이 핵심적이며 필수불가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예비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이처럼 불가분적인 계기들을 서로 분리하여 고려하는 방식은 “정신의 총체성”의 표상/재현과 구별된다.
오직 정신의 총체만이 시간 안에 있고, 정신의 총체성의 “형태” 로서의 “형태” 들이 시간적 연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오로지 전체만이 참된 현실성을 가지며 따라서 타자와 마주한 순수한 자유의 형식인 시간으로 표현되는 형식을 갖기 때문이다. (¶679)
흥미롭지만 매우 압축된 이 구절은 (가능한 정신의 모델들에 대해 대립적이라는 의미에서) 현실적인 정신, 시간성 및 자유라는 주제를 연결하고, 그리하여 헤겔이 시간 안에서의 정신의 자기실현을 자유의 현시로 생각하는 방식과 이유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그러나 현재의 요점은 바로 다음과 같다. 정신으로서의 정신인 정신의 총체성만이 시간 안에 존재한다면, 그래서 정신의 총체성만이 시간 안에서 탐구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내용은 시간 안에서 탐구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까지는 정신이 정신 자신의 “현실성” 속에서 탐구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주체인 정신이 무엇인지를 이제서야 고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헤겔이 “종교”의 시작 부분에서 말하고 있듯, [이전의] 정신은 아직 자신을 정신으로 알지 못하며, 그리하여 정신의 (궁극적으로) 절대적 위상에 대한 표상인 종교를 상이한 삶의 경험적 구성요소들 중 하나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6장의 주체조차도 여전히 제한적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학>이 이전 논의와 달리 이제부터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겔이 기술할 때 매우 명확하고 확실하게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들이 엄격한 의미에서[역주: 독일어 원문은 “본래적인”] 현실성들인 실제 정신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이들은 이전의 형태들과 구별되며, 단순히 의식의 형태들이 아니라 세계의 형태들이 된다.(¶441)
다시 말해, [이제 까지는] 헤겔이 종종 <현상학>을 부르는 이름, 곧 서론 또는 예비학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현상학>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정신을 연구하거나 이해하는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러한 자기-앎의 방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에 점차 다가가고 있으며, 분명하게 말하면 정신이 역사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 정신이란 정신이 현실 속에 자기 자신을 산출한 것일 뿐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오직 의식이 역사적 것일 때만 의식에는 “자유로운 현실의 형식”이 주어질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그 의식은 정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218] 절대정신인 자신에게 대상이 되는 정신만이 자유로운 현실이면서도 그 현실 안에서 여전히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있다.”(¶678)*** 정신이 절대 정신으로서의 자신에게 대상이 된다고 하는 이러한 이해를 감안할 때, 이렇듯 정신을 그 현실성 속에서 이해해야하는 필연성의 실현이 절대지를 얻는 것과 관련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너무 섣부르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 역주: 독일어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로써 정신은 자기를 지탱하는 절대적이며 실재적인 본질이다. 지금까지 의식의 모든 형태들은 정신의 추상이다. 이들은 바로 정신이 자신을 분석하여 자신의 계기들을 구별하고 이 계기들에서 머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계기들을 따로 떼어내는 것은 정신을 전제로 하며 정신을 존립으로 삼는다. 즉, 실존인 정신에서만 고립은 실존한다."(¶440) 세 번째 문장의 '이들은 ~ 사실이다'라는 표현은 의미 상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어서 영역본은 "~점에서 ~생겨난다"로 옮기고 있다.
** 역주: 원문에는 "정신"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지만, "“정신”장"에 대한 오기로 보아야 함
*** 역주: 문장 주어부는 “[정신] 자신에게 절대정신으로서의 대상이 되는 정신”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다소간 섣부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또한 자학의 상처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헤겔에게 인간의 주체성은 시간을 거쳐 스스로를 만들어 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또한 그러한 자기-산출과 재산출의 중심에는 (사회적 권위의 획득과 상실의 순환을 겪는) 사회적인 (곧 널리 받아들이는) 자기이해 형식들이 존재한다. [헤겔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생각에는 소위 헤겔 좌파적 해석에 속하는 익숙한 측면들이 들어있다. 하지만 헤겔의 입장이 지닌 두 가지 측면은 그의 기본적 생각이 오늘날 공명하지 못하게 방해해 왔다. 그 기본적 생각은, 이 주체성의 자기 산출의 기저에 고정된 목적론적 방향이 있으며, 그 목적은 (이런 저런 의미에서) 서구 근대에서야 비로소 달성되기 시작한 목표 또는 목적이라는 (이제는 조악한 것으로 보이는) 생각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헤겔이 개념의 유동성과 정신적 생명을 현시하는 것인 경험에 의존하기 시작함으로써,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 로고스 없는 것a-logos으로 여기는, 특수한 문화의 역사적 삶의 거칠고 무작위적인 우연성과 그[역사적 우연]에 내재적인, 무엇이 권위 있는 규범인지에 대한 다양한 논쟁을 [자신의 논의 안에]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마도 헤겔에 고유한] 생각은, 오늘날에는 [철학적] 선택지라고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철학이 다룰 수 있고 실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3
이러한 회의懷疑는 “자신의 손에 의한 폭력에 고통받음”,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그리고 자학에 의한 상처의 문제로 우리를 되돌려 보낸다. 이 문제는 헤겔이 이성적이라고 간주하는 그리고 이성적이라는 점에서 자유의 실현이라고 간주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전개를 추동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절대지” 장은 바로 헤겔 자신이 지속적으로 의거했던 이 “경험의 논리(학)”에 대해 최종적 해명을 시도하는 장소이다. 그 논리(학)는 단지 행위하고 인식하기 위한 다양한 규범들을 경험에 “대조하여” 검사하기만 하는 것과 연관되는 듯 보일 수도 있다. 이때 그런 의미에서 경험은 일종의 독자적인 검증자이며, [문제되는 규범을] 가능한 부정에 “노출” 시키는 것, 또 자기-확신을 지닌 것에게 변경을 강제하는 경험적 척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장에서 헤겔은 더 상세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이[와 같은 관점]는 지금껏 진행되어온 것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일종의 자기이해 혹은 규범적 신념의 “외화-내어줌externalization(=Entäußerung)”━이 외화-내어줌은 또한 헤겔에서 단지 주관적 확실성을 가지고 시작했던 것을 “부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은 [219] “내적으로” 추동되는 것이며, 그러한 경험은 독자적인 검증자 혹은 외재적 검토로 기능하기보다는 어떤 자기이해 혹은 개념적 내용 자체가 지닌 규정을 확립시키거나, 실현하거나, “완수”하는데 도움을 주는 기능을 한다.* 경험적 현시들(Experiential manifestations)은 그러한 내용의 “사례” 혹은 예시들이 아니다. 그러한 경험적 차원들이 개념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다.** 헤겔의 지적에 따르면, ‘아름다운 영혼’ 및 (순수 의무에 관한) 엄격한 도덕주의의 오류란 정확히 (어떤 주체가 제어할 수 없어서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타자의 해석 및 타자에 대한 영향을 전제하는 외부의 공적인 세계에 그 자신이 대립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할 때, 헤겔은 명백히 <현상학> 전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기술하기 시작한다. 이 설명의 도입부는 그 전체를 인용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개념은 완고하게 자신을 자신의 실현에 대립시키기 때문에 개념은 일면적 형태이며 우리는 그 일면적 형태가 공허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지만, 또한 긍정적으로 스스로를 외화하고-내어주고 지속적으로 운동해 나가는 것임을 보았다. 이러한 실현을 통해 개념 자신의 완성에 맞서 개념이 지닌 규정성인, 이 대상 없는 자기의식의 자기 고착은 지양된다. 개념의 자기의식은 보편성의 형식을 얻고 자기의식에 남는 것은 자신의 참된 개념인 자신의 실현에 도달한 개념이다. 자기의식은 자신의 진리, 다시 말해 자신의 외화-내어줌과 통일 속에 있는 개념이다.(¶795)
이 구절은 헤겔 저작에서 규준이 될 정식들을 도입하고 있다. 특히나 이 구절이 도입하는 주장은, 우리가 개념을 그 “현실성” 속에서 이해해야 하며 개념적 내용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참된 이해이고 ‘자신의 현실성과 더불어 있는 개념’으로 정의定義되는 이념에 대한 개념파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개념들을 그들의 “정신적 생명”에서 이해해야 하며, 언제나 “자기-운동”하는 것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현상학>의 주장뿐만 아니라, 이 “살아있는” 내용이라는 개념은 내용을 구성하는, 불가피한 자기외화-내어줌의 결과이지 사전에 규정된 내용을 외적으로 시험적으로 검사한 결과가 아니라는 주장도 정식화하고 있다.
* 이 문제에 대한 온전한 논의라면, 칸트가 <1 비판>에서 개념과 직관을 구별하는 방식에 대해 헤겔이 비판하는 바가 갖는 함의를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이 단락에서 주장하는 것은, 개념과 직관을 엄밀하게 분리하려는 가능한 모든 시도를 부정할 때 함축된 것이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는 것이다.
** 이는 지나치게 단순하며 투박한 요약이다. 헤겔은 전혀 유명론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보편과 특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내재주의적”이며 anti-chorismos의 입장으로 간주하는 듯 보이며, 이에 추가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적이며 중대한 주장을 펼친다. 곧 헤겔에 따르면 보편은 “운동하며” 시간 속에 있고 변화한다.
4
지금까지의 말들은 단지 문제를 재-정식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말들이 맡은 역할의 대부분은 [220] “자유”, “정의”, “설명”, “아름다운”, “경건한” 등등과 같은 “두꺼운” 개념들의 내용과 권위 모두를 본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어떻게 역사적 변화에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단락에서 헤겔은, 자기외화-내어줌으로써 자기를 완성하고 외면성과 재통일에 이르는 논리의 범례範例가 [바로] “행위하는 자기-확신의 정신”(¶796)* 이라고 말하며, 이 중심적인 장章 전체에 걸쳐 이 말을 계속 반복한다. 이는 문제의 해명을 향한 엄청난 진일보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헤겔이 여기서 <현상학>의 5장 C절(=하위장)과 6장 C절이라는, 행위에 관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논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5장 C절은 “자신이 즉자대자적으로 실제적이라고 간주하는 개별성”** 절이며, 이 절의 요점은 개별성은 “즉자대자적으로 실제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6장 C절인 “자기 확신적 정신, 도덕성”절의 요점 역시, 어떤 주체가 순전히 자기 확신적인 자기 이해를 일관적으로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 절에서 헤겔이 보여주는 현상학은 근대 서구적 전통에서 사건과 행위 간의 구별에 대한, 그리고 개인과 소행(=한 일; deed; Tat)의 관계에 대한 표준적이며 기초적인 이해가 되는 것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한계들을 끝에 절대지에 가서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가 될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 역주: Pippin은 이를 “the self-assured Spirit that acted ”로 번역했는데, 우리말로 직역하면 “행위했던 자기 확신의 정신”이 되지만 인용에서 생략된 전체 문장의 주동사의 시제가 과거라서 영어식으로 시제를 일치시키느라 생기는 문제로 보인다. 인용구의 원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이 개념은 한편으로 행위하는handelnd 자기 확신의 정신에서, 다른 한편으로 종교에서 자신을 채우는 내용을 스스로 부여했다Seine Erfüllung gab sich dieser Begriff, einesteils im handelnden seiner selbst gewissen Geist, andernteils in der Religion.”
** 역주 : 5장 C절에 대한 헤겔의 원문의 본래 제목은 “즉자대자적으로 실제적인 개별성 Die Individualität, welche sich an und für sich selbst reell ist”이다.
[행위와 관련하여] 근대에서 출발점을 이루는 구별은 행위를 개인에 의해 고의로, 곧 어떤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종종 어떤 의도로부터, 의도에서 벌어진, 또는 의도 때문에 일어난 행동을 의미한다고들 말한다. 또는 어떤 벌어진 일에 대한 가능한 수많은 기술記述들 중에서 어떤 참인 기술구가 존재할 때, 그 기술구에서 [그 일이] 의도적인 것이 되는 그러한 것이 바로 행위이다. 개인과 그의 소행 간의 관계는 근대적 전통에 속한 흄적 입장과 칸트적 입장 모두에서 인과적으로 이해된다. 흄에서는 이 관계는 자연적 인과이며, 칸트에서는 예지적noumenal 인과이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전제된] 가정은 분리된 심적 사건이 육체적 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행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과, 행위에 대한 어떤 설명에서든 본래적인 초점은 이러한 인과적으로 효력을 가지는 특정한 선행적 (정념이든 준칙이든) 심적 상태 혹은 의도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렇듯 <현상학>에서 유의미한 두 절 모두에서 헤겔은 이러한 인과적 입장의 심각한 한계를 현상학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며, 그 대신 (인과적으로 야기되는 다양하게 구별되는 행위의 국면들을 들여다보기보다는) 행위란 확장된 시간에 걸쳐 진화하고 변화하는 주체의 의도의 표현으로 보아야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행위는 핀커드가 “사회적 공간”이라고 명명한 것 안에서 발생하는 확장된 대결과 반응에서만only in extended confrontation and reaction 규정될 수 있는 것이며 [이와 같은 사회적 공간에서] 동떨어진discrete [마음 안의] 어떤 사건의 인과적 결과가 아니다. 곧 헤겔은 오로지 주체가 선행적으로 정식화한 의도를 들여다보는 것이 행위 규정을 고정할 수 있고, 행해진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규정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는 의도라고 추정되는 바가 [221] “현실적인” 의도로 이해되는 한, 그것이 행위 안에서 표현되는 일과 시간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역주: 의도는 행위에서 표현됨으로써만 현실적 의도가 된다]. 곧 헤겔은 소행의 과정에서 그러한 주관적인 정식과 이유[곧 주체가 자신의 의도 및 이유로 마음속에 가진 것]들은 변화할 수 있으며, 분명 사람들은 현실적 의도와 동기에 관해 잘못 알 수도 있고, 이러한 공적인 사회적 공간 속에 있는 소행에서 표현된 것으로서만 그들이 [행위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약속한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그리고 간혹 신념의 이유가) 명시적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반직관적 입장이다. 이는 헤겔이 말하듯, 주체는 종종 그가 행한 것이 무엇이고, 그가 소행에 간여한 바가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를 “소행으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로 행해진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확정하는 일은 사회가 그 소행을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깊이 의존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헤겔은 이 입장을, 개념과 개념의 “현실화”나 “달성” 사이에 엄격한 분리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 개념적 내용의 이해를 위해 (내가 <현상학>의 중심적 입장으로 규정한 바 있는) 규범이 지닌 “유동성” 및 “살아있는 정신”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매우 자주 언급하는데, 우리의 맥락에서 보면 이 입장은 헤겔이 그렇게 언급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학>의 중요한 절들[5장 C절과 6장 C절]에서 나타난 헤겔의 관점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의도를 가진다는 것은 공적이며 [그 의도에 관해 해석상] 공적으로 다툴 수 있는 소행 속에 의도를 표현하려 애쓴다는 것이다. 이때 이러한 소행은 엄청난 시간적 유동성을 겪게 되어 있으며, 어떤 이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관해 지니는 그 자신의 의미를 크게 바꿔놓을 수 있는 타자의 해석 및 전유를 겪게 되어있다.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우리의 자기이해가 가진 순수성과 확실성(그리하여 보장)을 “희생”하고 그 자신을 타자의 반응, 반대 주장, 도전에 내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관적 확실성의 내적 요새 속에 남아있으면서 형식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에만 고착된다면, 우리의 자기 이해는 의심 속에 유예된 채 남아있게 될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의 본 모습이라고 믿고 있는 바에 실제로 관계하고 있는지 여부나, 자기 이미지의 “현실성” 또는 규범적 적절성 주장의 “현실성”문제는 유예된 채 남게 되며 그 때문에 진정한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만큼이나 환상일 뿐인 결심이나 의도 혹은 신념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행위는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부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 행위는 소행의 핵심적 의미와 본성을 완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갖는다는 주체의 자만을 부정하는 것이자 그러한 권위를 타자와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고, 심지어 (플라톤적이면서도 칸트적인 전통 속 의미에서) 비-역사적이며 선험적인 분야로서의 철학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헤겔이 말하는 “그 자신의 자기의 상실”이라는 의미에서 “절망의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78).*하지만 헤겔이 예시로 이용하는 다른 수많은 기독교적인 이미지들에서처럼 [222] 경험적 도야는 이러한 거짓된 자립성과 주인 됨의 상실을 통해 ━<법철학>에서 “이 타자 속에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언급되는**━ 진정한 자립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 참고: 특히 헤겔이 주장하는 사변적 동일성은 행위의 내면과 외면 사이에 존재한다. “정신의 위력은 그것이 표현하는 만큼의 위대함을 지니며, 정신의 깊이는 자신을 펼쳐내고 그 펼침 속에서 자신의 상실을 감행하는 만큼의 심오함을 지닌다.” (6, x10)
** 헤겔, <법철학>, §7 주석. 헤겔은 필시 “두” 성서에서 나타나는 주요 사건들의 ‘논리적’ 요점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히브리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신이 자신만으로는 불충분했기에 세상을 창조하고 자신을 “외화”해야 했다는 사실을 재현하고 있다(여기서 헤겔은 이 단어에 대한 루터적 해석, kenosis[=신의 자기 격하, 곧 신의 인간됨을 말한다]에 대한 루터의 번역을 받아들이면서, 더 나아가 그 [kenosis라는] 이미지의 의미를 ‘신이 자신의 타자에 대해 자신을 버리거나 상실하거나 외화-내어주어야만 신은 마침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주장한다는 점은 거의 분명하다. 이점에서 나는 테리 핀카드Terry Pinkard의 곧 출간될 <현상학>번역과 해석을 따르고 있다). 신약에서 이미지는 훨씬 더 헤겔적이다. 아버지 신은 아들이 되어, 그를 현세 속에 외화-내어주고 잃어야 했으며, 그러면서 화해 혹은 성령을 예비해야 했다. 내 생각에 여기서 더 심오한 요점 역시, ‘주인이자 노예이며, 자신의 아버지이자 그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의 상징적 위상’이라는 궁극적으로 정치·윤리적인 것이다.
5
“절대지” 장에서 헤겔은 이와 같은 말을 여러 번 사용한다.
행위의 이 운동을 통해 정신은 자기의식으로서의 앎의 순수한 보편성으로, 곧 앎의 단순한 통일인 자기의식으로 등장했다. 오로지 행위를 통해서만 정신은 실제로 현-존하는(=거기 있는; da sein)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행위를 통해서만, 정신이 자신의 현존재를 사유로 고양시키고 이로써 절대적인 대립으로 고양시키면서도, 그 대립 안에서 그리고 대립을 통하여 그 대립으로부터 벗어나 복귀할 때 정신은 존재할 수 있다.(¶796)*
행위의 본성에 관한 헤겔의 설명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 곧 그가 이러한 요구 조건에 관하여 “화해에 도달한” 경험 및 앎의 논리적 형식에 대한 범형으로 간주하는 것(즉 절대지)에 대해 헤겔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렇게 놓아버리는 것은, 즉자적으로 시작을 이루고 있는 개념의 일면성에 대한 동일한 포기이다. 하지만 그것이 포기한 개념이 그 자신의 개념이듯, 이제 그 놓아버림도 자신의 포기이다.(¶796)
그리하여
즉자의 직접성을 운동하게 만들고, 혹은 역으로 처음에는 단지 내적이었던 것을 드러내고 실현하게 되며, 즉 즉자를 정신의 자기 확신에 되돌려 주게 된다.(¶801)
이 맥락에서 헤겔은 희생에 관한 자신의 비유로 돌아가서 어떻게 이 대립의 양 극이 [223] 타자를 위해 “죽는다”고“die” to the other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이 대립은 형식적 보편성 대對 살아있는 풍부한 내용 간의 대립, 혹은 순수하게 자기 확신하는 주관적 의도를 행위의 본질로 정식화하는 것 대對 타자에 의해 개인에게 부여되는 책임의 의미 및 범위의 대립, 또는 순수 의무 대對 불가피하게 감각적이며 매우 인간적인 동기에 대한 연관의 대립 등이다. 헤겔이 계속해서 되돌아 가[서 참조하]는 범례적인 묘사는, 행위 주체가 자신이 주관적으로 정식화한 의도가 결정적 역할을 맡는다고 고집하면서 행해진 일이 무엇이며 그 행위의 범위가 어디까지를 포함하는지에 관해 특정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개인적인 권위라고 주장한다 해도, [그 주체가] 의도에서 행위로 현실적으로 이행하게 되면 이 이행은 그러한 순수성에 대해 유감스럽게도 제약이나 침범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어떤 의도를 수행하는 것은 표현인 만큼이나 폭력/위반이다. 타자의 수용이나 반응은 [주체의] 짜증을 유발하는 것이자 궁극적으로는 [저] 행위 주체의 고유한 사무에 대한 [그 일에] 관계없는 타자의 침범으로 간주된다. 헤겔이 5장 C절에서 말하듯, [타자들은] “엎질러진 우유에 꼬인 파리 같은” 것이다. 주체의 이러한 태도는 다양한 실존적인 병리들을 일으키면서 “마음의 법”, “자기-기만의 광란”, “정신적 동물의 왕국과 기만, 또는 사태 자체”, “아름다운 영혼, 악”과 같은 “경험적” 교착상태로 이어진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 환상의 세계 어떤 측면이든, 곧 우연적 동기를 가지고 정념 만족을 추구하는 것으로 자신을 이해하든, 아니면 순수하게 자기 입법적인 예지적인noumenal 주체로 자신을 이해하든 간에 이러한 자기이해에 바탕 해서는 “현실적으로” 행위 할 수 없다. 그리하여 헤겔이 지적하듯 화해와 “희생”의 계기가 없다면, 일종의 살아있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die a kind of living death.
* 역주: 이러한 번역은 영역자의 해석이 반영된 의역이다. 원문은 “ Durch diese Bewegung des Handelns ist der Geist - der so erst Geist ist, daß er da ist, sein Dasein in den Gedanken und dadurch in die absolute Entgegensetzung erhebt, und aus dieser eben durch sie und in ihr selbst zurückkehrt - als reine Allgemeinheit des Wissens, welches Selbstbewußtsein ist, als Selbstbewußtsein, das einfache Einheit des Wissens ist, hervorgetreten.” 이를 좀 더 직역에 가깝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행위의 운동을 통해 정신―그것은 거기-있음[=현-존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의 현존재를 사유Gedaken로 고양시키고 이로써 절대적인 대립으로 고양시키며 이 대립 안에서 그리고 대립을 통해 대립에서 벗어나 복귀함으로써 비로소 정신이 된다―은 자기의식으로서의 앎이 지닌 순수 보편성으로, 곧 앎의 단순한 통일인 자기의식으로 등장했다.”
주관적으로 자신을 확신하는 애초의 관점에서 보면, 행위는 자기 부정이자 순수성 및 소행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이는 소행 속에서 내 자신을 보기 위한, 그리하여 자유를 보기위한 조건으로 간주된다―에 대한 폭력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겔은 그와 같은 [배타적] 자기이해에 수반되어 있는 엄청난 부담을 그려내고자 하며, 경험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타당하게 만들고자 한다. 곧 그러한 고집은 (“도덕성”절에서 “냉정한 마음의 몰락”에서처럼(¶669))* 결국 이 부담에 짓눌려 붕괴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런 주체는 자신의 순수한 주체성에 대한 이 같은 부정을 그 주체성의 진정한 실현이라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부담”은 단지 논리적으로 양립불가능한 신념들의 문제일 뿐이거나 주로 그러한 문제에 국한 된 것이 아니며, 저 “붕괴”가 그 같은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개념적 해법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상학>이 붕괴시키고자하는 고집스런 일면성을 영속시키게 될 것이다.
* 같은 단락에서 헤겔은 ”정신의 상처를 치유되며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는다.“라고 말한다(¶669).
<현상학>의 중심적 “운동”을 그려내기 위해 행위 분석에 이렇게 의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점에서 헤겔은 옳았다. 만일 이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더 명백하게 보일 것이다. ‘나’의 자기 앎의 내용을 다루면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24] 내용은 ‘내’가 자신의 타자 안에서 그 자신과 교제함(자기자신으로 있음bei sich sein; communes with)을 통해서만 오로지 개념 파악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내용은 방금 말한 바로 그 운동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대상성 속에서 개념의 ‘형태’를 지님으로써 정신 자신의 ‘자기’를 두루 거치며, 그것도 대자적으로 거쳐나갈 때 이러한 정신이 바로 내용이기 때문이다.(¶799)
하지만 헤겔이 이처럼 행위 설명에 대한 의존함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곧 <현상학>에서 행위 설명이 개념성 자체conceptuality itself에 대한 설명에 그렇게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고 헤겔이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광범한 문제이지만, 내가 제안하는 바는 헤겔이 개념성 문제를 일반적으로 규범성의 문제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규범성 문제란 ―‘뇌가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느냐’, 혹은 ‘무엇이 실제로 인간에게 동기가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상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 그리고 행위는 어떻게 정당화 되어야 하는가?’를 의미한다(말하자면, ‘무엇이 믿어져야[인식되어야] 하며,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이다.) 최근 주석자 브랜덤Brandom은, 헤겔에게 “정신적인 것의 영역”은 “규범적 질서”라고 올바르게 말했다. 근대 이원론의 핵심을 자연과 자유, 유물론과 비유물론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로 생각하기보다는, 그것을 자연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 인과의 공간과 이성(이유)의 공간에 관한 “논리적”이고 범주적인 문제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헤겔을 다시 세상 안으로, 특히 매우 재밌는 방식으로 오늘날 영어권[논의]안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는 주지의 사실이며 또한 매우 높게 평가받는 일이다. 또한 헤겔이 개념 혹은 규범을 함수적으로functionally, 칸트주의적으로 말하자면 가능한 판단의 술어로 사유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헤겔이 개념 혹은 규범적 내용의 가능한 모든 파악을, 언어적이며 규범에 민감한 혹은 “판단하는”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현실적 사용에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그가 칸트보다 훨씬 멀리 나아간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나아가 여기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문제이긴 하지만 이러한 해석 방향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규범적 강제나 규범적 이상理想이 지닌 권위의 본성은 “자기 입법적”이어야 하며, (‘정신은 스스로의 산물이다’와 같은) 헤겔의 자기-산출적 언어는 철학적 인간학으로의 입구라기보다는 규범적 권위의 본성에 대한 설명의 시작이어야 하고 헤겔의 이러한 언어는 칸트의 <정초>에 나오는, ‘우리는 우리가 복종하며 스스로를 복종시키는 그 모든 법의 입법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유명한 요구에 대한 공명共鳴이어야 한다.* 이러한 가정 하에서, 규범적 권위를 실행하는 것은 공적인 사회적 공간에서 의도를 표현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게 이해된다. 이는 충분히 조화로운 사회적인 의미 맥락이 존재하며 이 맥락이 그 권위에 맞서는 도전들에 올바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경우에만 권위를 가진 것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 Pippin (2003) 참조.
** 서문에서 이성은 ”합목적적 활동“으로 해석된다(¶22).
6
[225] 하지만 행위에 대한 설명에서처럼, 의도주의 혹은 인과론적 설명의 일면성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나, 개념적 형식주의에 속하는 모든 개념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우리를 (마치 일어난 일이 무엇이며, 왜 일어났고, 무엇이 행해졌는지에 관한 주체의 견해와 무관하게 “타자들이” 규정한다는 식의) 행태주의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행위 이론을 하나의 [대표적]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입장에도 동일한 것이 적용된다. 헤겔의 입장은 철학을 어떤 순전한 규약주의conventionalism나 앎의 사회학으로 변신시키기 위한 서문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헤겔이 규범적인 주장들에 대한 개념 파악 가능성을 [관련된] 개인과 공동체의 이성화rationalization 과정에 연결 짓고 있다는 것이다. 정당화를 내세우는 이 규범적 주장들에 관계하는 현상학자인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헤겔의 저] 논제가 의미하는 바는, 이유를 제시하거나 이유를 요구하는 실천이 실패 혹은 몰락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실천의 참여자들이 제기하는 주장의 기초(그들이 그 주장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하며 “정당화”의 작동 방식을 충분히 광범위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는 곧 헤겔이 그러한 개념 파악의 조건인 이해 능력이 또한 저 규범적 원리[앞서 말한 규범적 주장의 기초]들의 특정한 일면성을 이해하며 그리하여 그 원리가 몰락하는 철학적 이유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헤겔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그 주장의 자격조건quality에 대한 물음에는 차이가 없다. 우리는 주체가 [타자로부터] 도전받을 때 어떤 목소리로 토로하는지는 관심이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주체의 표현이 정당한 것인지, 그렇다면 왜 그러한지이다.)
인정컨대, 이러간 간략한 요약은 너무나 많은 것을 가정하고 있다. 실상 이는 굉장히 논쟁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형식의 비합리성이 일종의 고통으로, 다시 말해 공동체의 규범적 역사에서 권위와 권위상실의 순환을 설명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특정한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생각은 극단적으로 논쟁적이다. 인간이 모종의 비-이성 혹은 비규정(성)이라는 부담을 안고 오랜 시간 살 수 있다는 경험적 증거는 너무나도 강력하다.
하지만 헤겔은 그의 설명이 예견적인 것이라고 전혀 주장하지 않는다. 그의 설명은 명백히 회고적이며, 재구성적인 목적론이다. 그리고 설명이 주해의 목표로 삼는 것은 오로지 그와 같은 “현실적” 순간들인바, 그 순간들에서야 상정된 규범적 내용과 그 내용의 “외화-내어줌” 사이의 추상적 대립 속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수정이 그러한 이원론에 덜 종속적인 방식으로 경험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정신의 자기 앎에 대한 전체적 설명 안에서 그러한 순간-계기들이 가진 의미에 대한 주해注解가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일종의 자기-부정 및 자기-외화로 이해되는 규정성에 대한 이러한 [정신의 자기 앎에 대한] 설명의 세부적 내용을 풀어내는 일은 수많은 연구를 요하며, 말할 것도 없이 [226] 여러 권의 책를 써야하는 일이다(이때 설명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은 일관적인 사회적 맥락과 적절한 사회적 수용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맥락에 속한 논쟁들이 모든 차이에 앞서 어떤 이해가능성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그러고 나면, 이러한 헤겔 자신의 관점이 칸트의 개념과 직관에 관한 교설이나 비-아의 자기 정립에 관한 피히테의 교설 혹은 셸링의 무차별의 지점Indifferenzpunkt에 관한 교설들보다 더 낫다고 헤겔이 생각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연구들이 더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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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제안된 방식으로 이해된 헤겔의 설명은 절대지 주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첫 번째는 악명 높은 완전성 또는 폐쇄성Abgeschlossenheit 문제, 그러니까 <현상학>의 끝에서 도달하는 완성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헤겔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언급 한다.
양 측면의 통일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Pippin 註: 헤겔은 [한편으로] [정신] 자신에 대한 정신의 "순수한" 앎을, [다른 한편] 그러한 자기 이해에 대하여 공적인 사회적 세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외부적 억압, 한계 및 대립―결국은 지양될 대립―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종교의 자기 이해에서는 이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Pippin 註: 명백하게 이 장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인 "절대지"]은 바로 이렇듯 정신의 형태들의 계열을 매조지는 것이다. (¶794)
그리고 다음 문단에서 헤겔은 “자기 의식적 정신의...내용”( ¶795)을 제시하면서, 어떤 "완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실제로 절대지라는 현상학적 개념의 내용으로 제시되는 “내용”은 별로 없으며, 이러한 완전성도 서론격의 완전성일 뿐이다. 절대지 주장의 주제적 내용은 정신이 단순히 “자신이 즉자적으로 있는 상태인 절대적 내용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라고 알거나, 자신이 대자적으로 있는 상태인 자기의식의 측면이라고, 곧 자신이 내용을 결여한 형식이라고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질과 그 현실 모두 안에 혹은 즉자대자적으로 있다는 앎”에 도달했다는 것이다(¶794). 이것은 단지 정당한 규범적 내용임을 내세우는 모든 특수한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준비일 뿐이며, 현재 <현상학>에서는 아직 그러한 주장을 하지는 않고 있다(근대적인 객관 정신이나 인륜성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자 매우 정합적인 것이다).* “현실화된” 정신에 대한 연구는 진정으로 “학문적”인 것이며, 이는 이러한 종류의 해석에 따라 나타나는 두 번째 문제를 제기한다.
* 절대지의 설명에서 행위 이론적 방향이 ━단지 예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1805-06 정신철학>에서 부분적으로 확증이 가능하다. <1805-06 정신철학>에서 인륜적 공동체Gemeinwesen는 절대 정신의 현존재das Dasein des absoluten Geist라고 명명된다. 지프(2000), 247 참조. 지프는 또한 절대지가 실천적인 자기의식의 문제로 도입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강조하지만 우리 논문에서 제안하는 것과 달리 그 문제를 헤겔의 행위 이론에 연결짓지는 않는다.
[227] 해석자들은 보통 다음 구절에서 “학문”의 지시체에 관해 이해할만한 해석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바로 그 본질인 개념은 현존재의 지반이 되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의식에 대해 대상성의 형식이 되었다. 이 지반에서 의식에 현시되거나 현상하는 정신, 또는 동일한 것이지만 의식에 의해 그 지반 안에 산출된 것이 학문이다. (¶798)
[해석자들은] 이것이 지시하는 바가 몇 년 후 뉘른베르크에서 저술된 헤겔 체계의 기초가 되는 <논리의 학>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헤겔이 서문 끝에서 말한 것을 감안할 때 이해해 줄만한 것이다. *
* “논리학 또는 사변 철학”에 관한 그의 언급(¶37).
그러나 우리가 고찰했던 모든 것에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너무 협소한 지시체이다. 우리는 또한 “순수한 본질들의 운동”을 본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염두에 두어야한다(그리고 이것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 “순수하게” 또는 독립적으로 자기운동하는 사유로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34).* 결국, [<현상학> 끝에서] 도달한 입장은, “그 자신의 진리 속에 있는 개념”은 언제나 “자신의 외화-내어줌과의 통일”(¶795)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독립적인 범주 이론, 혹은 현상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자기-운동하는 개념적 구조 혹은 현실적 의식 작용 구조(noetic structure)에 관한 교설이 헤겔의 기본적 입장을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상학>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놓치고 있으며 그 본래적 내용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분명 헤겔은 “즉자대자적 정신에 대한 앎”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정신의 총체적 자기 앎을 가리키고 있다. 이 정신의 앎이 이룬 총체성은 전체를 이루는 것으로서의 <철학백과>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총체성에 대한 예비이자 외화들 역시 의미한다. 곧 본래적 예비인 현상학its proper phenomenological preparation 및 예술, 종교, 정치 역사 및 세계의 역사 속에서 현시되는 “외화들” 역시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논리의 학> 자체가, “논리학으로 환원하는(logicizing)” 일면적인 헤겔에 대한 독법에 분명 경고를 내보이고 있다. 적어도 “개념 논리” 시작할 때 나오는 다음 구절 자체가 헤겔의 입장에서 잊을 수 없는, 그리고 떼어낼 수 없는 <현상학>의 교훈을 보여준다. 이는 심지어 [논리학 보다는] 현상학에 적합한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보편자는 ... 그 자신이며, 자신의 타자를 ━그에게 폭력을 가하면서━품에 안는다/포괄한다. 반대로 보편자는 그 자신의 타자 속에서 그 자신과 평화롭게 교제하고 있다/고요하게 자기 자신으로 머문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로운 위력이라고 불렀지만, 자유로운 사랑과 무한한 축복(지복至福)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자에 관계할 때 오로지 자기 자신에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 안에서 그것은 스스로에게 돌아와 있다. ***
* 이점에서는 Siep (2000), 256–257에 나오는 특히 도움이 되는 언급들을 참조하라.
** 역주: 첫 문장의 앞부분에서 피핀은 헤겔 원문의 “aber nicht als ein Gewaltsames” 에 대해 밀러의 번역을 옮기고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but not without doing violence to it” 이 아니라, Giovanni의 경우 처럼 “but without doing violence to it” 으로, 곧 “타자에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서” 로 번역하는 것이 옮다. 또한 첫문장의 술어인 “품에 안는다”는 “übergreifen” 을 “embrace” 로 번역한 것으로, 이는 밀러와 지오반니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übergreifen” 은 위 번역에서 그 뒤에 이어지는 두 번째 문장의 “타자 속에서 고요하게 자기자신으로 머문다” 는 내용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헤겔이 übergreifen”의 주어인 “보편자”를 “ als ... das vielmehr in demselben ruhig und bei sich selbst ist” 으로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두문장은, “보편자는 그 자신이면서도 타자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 속에서 고요하게 자기 자신으로 머물면서 자신의 타자를 포괄한다/품에 안는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으로 생각된다.
*** Hegel, <논리의 학>, §1331.
일러두기
이 논문은 Dean Moyar와 Michael Quante가 편집한 논문집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에12장으로 실려있다. 논문집 전체의 필자들이 참고한 <현상학> 은 Phänomenlogie des Geistes (PhG), eds. H.-R. Wessels and H. Clairmont.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88이며, 영역본은 Phenomenology of Spirit (PhS), trans. A. V. Mill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7이다. <논리의 학>은 Wissenschaft der Logik (WL). Frankfurt am Main: Suhrkamp Verlag, 1970 이며 그 영역본은 Hegel’s Science of Logic (SL), trans. A. V. Miller. Atlantic Highlands, NJ: Humanities Press, 1969이다. <법철학>은 Philosophie des Rechts (PR). Frankfurt am Main: Suhrkamp Verlag, 1970 이며 영역본은 Elements of the Philosophy of Right (PR), ed. Allen W. Wood, trans. H. B. Nisbe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이다. <철학백과>의 영역본은Encyclopedia of the Philosophical Sciences (EPSIII), Vol. III, trans. William Walla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1 와 The Encyclopedia Logic (EL), trans. T. F. Geraets, W. A. Suchting, and H. S. Harris. Indianapolis: Hackett, 1991이다. 나는 필자가 헤겔 원전 인용할 경우 인용된 영역본 페이지 수는 생략하고 단락 번호나 절의 번호만을 옮겼다. <현상학> 인용구의 경우 “(¶단락번호)” 이며, 헤겔의 다른 저작의 경우 “( § 절 번호)” 로 표시했다.
기타 필자가 논문의 본문과 각주에서 직접 언급한 인용 및 참고 문헌은 Pippin, Robert (2003). “Über Selbstgesetzgebung ” ,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Bd. 6와 Siep, Ludwig (2000). Der Weg de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Ein einführender Kommentar zu Hegels Differenzschrift und Phänomenologie des Geistes, Frankfurt am Main: Suhrkamp Verlag 이다.
위 번역에서 볼드-이탤릭체로 된 강조는 원 인용문 자체의 강조거나 피핀의 강조이며, “[ ]” 및 “[역주: ]” 내용은 내가 보충한 것이다. 또한 각주에서 “역주: ”라고 표시 된 경우 역시 내가 추가한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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