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계속>
“상처를 입힌 창槍이 상처를 봉합한다.” - 오페라 <파르지팔> 中

‘에덴에서 추방’에 관한 이상의 설명은 구약에서든 헤겔 입장에서든 아직 반쪽짜리이다. 왜냐하면 우선 헤겔은 이 상처와 분열을 극복―‘헤겔어語’로 하자면 “지양aufheben”―하고 세계와 “하나 됨을 복원”한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에덴에서 머물 때 신의 뜻(곧 그리스의 윤리/인륜에서 습속이었던 것)이 투명하게 세계의 의미를 전해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사고를 통해 다시 세계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세계와 다시 하나 될 것이다.” 게다가 이 복원은 자의적으로 헤겔이 사고에 부과하는 목표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고가 원했던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고로 인한 “분열[상태]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인간은 이 분열[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춰 있을 수 없다.” 사고는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Enz §24, Zu. 3, []는 인용자).*
헤겔은 ‘에덴에서 추방’에 대해 본격적 분석을 시작하기 앞서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사고가
“ 바로 상처를 입히고 또한 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welches die Wunde schlägt und dieselbe auch heilt”이며, 심지어 그 치유로 “흉터”조차 “남지 않는다.” (앞문장 인용은 Enz, §24, Zu. 3, 뒷문장은 PhG, ¶669, 강조는 인용자)
헤겔은 지금 분열과 상처의 극복이 다름 아닌 분열과 상처를 일으킨 사고를 통해 수행된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분열이자 상처 자체인 인간의 사고―이하의 분석에서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를 통해 그 극복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그 의미를 따져보기 앞서 잠시 우회하자면, 인용된 헤겔의 언급은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성물聖物을 지키는 기사단장(혹은 왕) 암포르타스Amfortas는 롱기누스의 창(성창聖槍)을 들고 적 클링조어Klingsor를 치러 나서지만, 클링조어의 수하인 요녀妖女의 유혹에 빠지는 바람에 오히려 성창을 빼앗기고 그 창에 상처까지 입는다. 후에 주인공 파르지팔이 성창을 되찾아 기사단에 돌아올 때까지 암포르타스의 타락으로 비롯되었던 상처는 고통스럽게 벌어진 채 낫지 않았다. 이제 창을 들고 나타난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에게 말한다. 치료에 “쓸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무기요, 상처를 입힌 창이 상처를 봉합할 것이다Nur eine Waffe taugt, die Wunde schließ der Speer nur, der sie schlug.”
헤겔이 자기 사후에 나온 바그너 오페라를 보았을 리 없으므로, 아마도 그는 오페라의 모티프가 된 13세기 에셴바흐의 서사시 <파르지팔> 혹은 그와 연관된 설화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헤겔은 인간의 사고를 지상에 내려온 신, 예수를 죽인 타락의 창이자 동시에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창인 롱기누스의 창에 비유하고 있다. 에덴에서 추방(그리스 윤리/인륜성의 몰락)됨으로써 인간이 거주하게 된 세계에는 더 이상 신이 머물지 않는다. 신 그리고 자연과 함께 노닐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됨과 더불어 인간과 세계의 통일인 “아름다운 인륜적 세계”는 현세를 초월한 저 너머의 언덕(피안彼岸; das Jenseits)으로 멀어져 간다. 인간이 거주하는 이 편 언덕(차안此岸; das Diesseits)은 “정신에게 버림받았다verlassen”― 이때 정신은 신神을 의미한다(PhG ¶567).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는 힘을 얻고 자신으로부터 세계를 밀쳐냄으로써, 그리스적 윤리/인륜성인 습속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세계와 인간 사이는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헤겔은 이 ‘벌어진 상처’를 입힌, 심지어 그 ‘벌어짐이라는 상처 자체인 사고’가 마치 저 롱기누스의 창처럼 다시 세계와 인간 사이를 봉합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처가 자기자신을 봉합한다. 이 구원의 약속은 그가 “창세기” 분석에서 인용하고 있는 신의 오래된 약속(구약;舊約)이기도 하다―이것이 앞서 언급했듯 <구약>에서도 앎으로 인한 추방과 저주가 반쪽짜리 이야기인 까닭이다.
“ 보라, 아담은 선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므로 우리 중의 하나같이wie unsereiner 되었다.” (창 3: 22; 강조는 인용자)
유대인들의 신의 이 오래된 약속은 최초의 인간의 타락·추방 자체인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또한 신성神聖한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헤겔은 이에 조응하여 “정신은 자유로워야 하며, 정신 자체는 자기 자신을 통해 존재해야”한다고 말한다(Enz, §24, Zu. 3). “자기 자신을 통한 존재durch sich selbst sein”란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그 자체를 통해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것들은 어쨌거나 있기 위해서 다른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신은 다른 무엇에서도 비롯되지 않으며 그 자체가 자신의 원인(자기원인; causa sui)이다. 곧 우리의 사고하는 정신은 신성한 것으로서, 다른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에서 비롯되어自由 존재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에덴에서 추방’에 대한 헤겔 자신의 분석(Enz, §24, Zu. 3)에서 그는 아직 사고가 어떤 “정신적 노동”과정을 거쳐 이러한 신성에 도달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채 단지 약속과 선언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구체적 과정을 묻기 전에 이미 이 과정 자체가 과연 가능할까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구체적인 설명과 무관하게 헤겔이 상정한 사고의 규정들 자체가 이미 명백한 모순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의 뜻을 어기고 스스로 사고하길 선택했고, 이 사고 자체가 상처이자, 세계와 인간의 분열이었다. 곧 사고는 상처를 내거나 치유할 수 있는 도구, 말하자면 외과 수술의 메스가 아니다. ‘사고 자체가 상처다.’ 그러한 상처가 어떻게 스스로를 봉합한다는 것인가? 그러한 사고가 어떻게 동시에 치유이자 세계와 인간의 통일이며 신성한 것이 될 수 있는가?
돌아가고 싶은, 돌이킬 수 없는
어쩌면 헤겔이 말하는, 인간 “정신의 노동과 도야(陶冶; Bildung)”를 통해 이 모순을 해결하리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는 정신의 “노동이 분열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분열의 극복”이기도 하다고 규정한다(Enz, §24, Zu. 3). 그는 세계와의 분열에서 출발한 앎이 스스로를 갈고 닦음으로써(陶冶) 분열을 지양하고 분열 이후 자신에 대립하는 자연의 힘 역시 지양하여 자연과 “하나 됨을 복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언뜻 보면 ‘돌아온 탕아(蕩兒)’라는 익숙한 서사 구조이다. 이야기 속 탕아들은 가정이나 고향의 질서를 해치고 떠나버린 후 고생 끝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죄를 일으킨 악한 마음을 ‘버림’으로써 돌아올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 사고가 노고를 들여 자신을 갈고 닦다보면 자연 및 세계와 대립을 일으킨 ‘거리두기’의 태도를 포기하고 이들과 다시 통일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태도를 ‘버릴 수 있느냐’이다. 그리고 헤겔은 이 해법에 반대함으로써 막다른 길을 선택한다. 주어진 것에 거리 두는 태도인 사고의 “부정적 위력”, 곧 신이 명명한 ‘원죄’ 자체가 헤겔이 보기에 사고의 본성이다.
“ 본성상 악함을 원죄Erbsünde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기서 원죄가 단지 최초의 인간의 우발적인 행동에 근거한다는 피상적 표상은 버려야 한다. ... 우리는 그렇지 않을 수도[곧 인간이 본성상 악하지 않을 수도, 나아가 최초의 인간이 달리 행할 수도] 있었다고 표상해서는 안 된다.” (Enz §24, Zu. 3, [] 및 강조는 인용자 )
곧 분열은 사고의 본성, 사고 자체이기에 우리가 ‘어떻게든 잘 하면’ 분열을 일으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은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또한 우리가 스스로 사고하면서도 ‘어떻게든 잘’ 도야한다면, 이 본성을 버릴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그래서 헤겔은 이러한 사고의 악을 근절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원래의 자연적 통일로 돌아가라고 하는 자들을 경계한다. 사고를 포기한 채
“ 인간이 자연적 존재자로 존재하고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관계한다면 이는 금해야 할 태도[곧 금해야할 자기관계]이다. ... 자연은 인간에게 단지 변형시켜야 할 출발점일 뿐이다. 원죄에 대한 교회의 깊은 가르침은, 인간이 본성상 선하며 따라서 이 자연-본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현대[=헤겔 당대] 계몽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Enz, §24, Zu. 3, []는 인용자)
마지막에 언급된 “계몽”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루소 <에밀>의 입장을 가리킨다. 헤겔은 지금 맥락에서 자연 본성에 충실하라는 요구를, 분열을 일으킨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포기하고 본래의 자연적 통일 상태, 곧 그리스적 윤리/인륜성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요구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는 헤겔에게 부끄러움도 모르는 부끄러운 상태로 돌아가라는 요구이다.
“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지만, 선악과를 먹고 앎을 얻은 후, “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야훼의 부르심을 받고 아담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 (앞 문장 인용은, 창 2:25, 뒤의 인용은, 창 3:10)
그렇다면 헤겔은 정확히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가? 우리는 세계와의 통일 상태로 머물러서도 안 되고, 사고로 인한 세계와의 분열 상태에 남아서도 안 되지만, 정작 분열을 일으키는 태도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면, 그럼에도 또 자연과의 통일은 회복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사고는 돌아가고 싶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인 듯 보인다.
<다음 글에서 계속>
* 이러한 설명은 헤겔 철학의 체계 전체의 이미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철학은 최후의 결과에서 자신의 출발점에 도달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철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 복귀하는 원으로 표현된다.”(Enz §17) <철학백과>를 쓸 때 헤겔은 “백과”의 독일어 표기 “Enzykolpädie”에 포함된 말인 “Zyklus” 곧 원환(圓環)을 분명 의식하고 있었다.
** 볼프람 폰 에셴바흐 Wolfram von Eschenbach의 13세기 경(추정) 서사시<Parzival>을 바탕으로 한 1882년 바그너 오페라. 대사는 네이버 블로그 “클래식음악블로그 필유린” https://blog.naver.com/opazizi/221806321347?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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