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도착할 것인가? 언제 도착할 것인가?
편지는 항상 수신과 발신 사이의 공간적이고 시간적 틈을 담고 있다. 게다가 지금 이 편지는 말 그대로 '먼 곳에서 먼곳으로' 향한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모국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조합은 어떤 불안과 부조화를 담고 있다. 외부자로서 타향 살이의 신파가 담길 수도, 모국에 거리를 둠으로써 생겨나는 신선함이 담길 수도 있는 것이다(하나 그 어느 쪽도 앞으로 내가 쓸 글들의 본디 직접적 의도는 아닐 것이다. 글의 배경에 나도 몰래 자리잡은 정서라면 몰라도). 여하간, 지구상 대부분의 장소에서 동시성 속에 살아갈 수 있게 된 지금의 상황에서도 이 불안 덕에 나는 '과도하거나 과분하게' 좀더 과거의 편지쓰기를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편지는 도달까지의 기다림을 상정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에 이미 말한 것이 미래에 올 것이라는 약속을 담는다. 미래. 나는 나의 지금이 아닌 것을 향해 글쓰기나 말걸기를 감행을 해야한다. 그것은 어떤 약속이며 동시에 기만이자 허망함이고 그럼에도 서로 다른 수신자와 발신자인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나는 당신이 있는 곳에 닿을 것이다. 약속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곳에 당신이 있는 한에서, 또 당신이 있을 곳이 나의 지금인 한에서 유효하다. 이 회로 안에서 나는 미래의 우리를 말하지만, 그 미래의 우리가 내가 쓰고 있는 지금에 머물러 있어야 약속은 가능하다. 그 때문에 나의 약속은 기만이다. 약속은 '진짜' 오지 않은 것인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닌 현재의 지속을 말한다. 그저 지금이 그 때까지 연장될 것이라는 기대나 믿음 속에 거짓 미래에 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대개의 서신은 이러한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가진 의미는 대동소이하며 이 '대동'함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약속의 불능따위에 아랑곳 없이, 우리는 같은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 그저 필요한 것은 "천재지변, 전쟁, 폭동 기타 당사자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없다면" 이라는 간략한 추가 조건이다.
그럼에도 당신만은 진짜 미래로 가버렸다면 어찌할까?
혹은 당신이 편지를 받을 때 쯤 내가 더이상 지금에 머물지 않는다면? 약속이 허망한 것이 될까 불안하다. 불안. 내가 하고 있는 말의 내용에는 '진짜' 미래가 담겨 있을 수 없지만 이 불안 때문에 그리고 이 불안에 내가 마음 쏟는 한, 나의 편지는 '혹시나' 하면서 당신과 나의 진짜 미래에 말 걸고자 하는 애씀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애쓰는 자의 편지는, 당신이 혹은 내가 지금 기대와는 다른 곳에 가 있더라도 그리고 쓰여진 말의 의미가 도무지 무의미한 것으로 휘발되더라도 그리하여 빈 종이에 다름없는 것이 되었더라도, 무언가 건넬 것이 있(었)음만은 전한다.
이런 면에서 모든 편지의 범례는 연애편지일지도 모른다.
연애의 처음이나 끝에 우리는 편집증적으로 하나가 되길 원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서로 어긋남(의 가능성)에 대해 극히 민감하게 된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우리의 미래가 더이상 지금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될까 두렵다. 그러한 불안 속에서 우리는 쓴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아마도 나는.."
이 상투어는 발신자의 전하기 어려운 마음만을, 그래서 몇번이고 고쳐썼을 그 내용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그것은 수신인이 머물 자리에 대한 탐색이다. 발신자가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면 그는 암묵적으로라도 미래의 허망함을 견딘 것이다. 제발 그 자리에 머물러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 없고 왜 가버렸냐고 원망해도 소용없는 그 미래의 허망함을 말이다.
그 허망함을 견뎌내고 또 견디면서, 당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혹여 내 편지가 닿을 수 있다면, 혹여 이 말들이 모두 무의미해졌더라도, 여하간 나는 나도 결정 짓지 못하는 어떤 무/의미를 전한다. 우리가 진짜 미래를 향해 부칠 수 있는 편지는 이 미결未決의 무/의미를 앓고 있는 편지이다. 이 편지를 당신이 해석해 준다면, 또한 그 해석에 내가 응답할 수 있다면 그때서야 문자에는 새로운 의미가 불어넣어 질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어떤 불안정을 담은 서신교환이자 일치(correspondence)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우리는 이런 류의 편지쓰기에서 앞서 말한 약속과는 다른 것을 약속한다. 곧 내가 무엇을 행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은 것을 향해 나를 내어줌을 약속한다. 나는 지금의 나에서 스스로 벗어날 것이며, 당신이 나의 지금 바깥에 머물 가능성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달리 말해 이 미결의 문자들의 의미가 당신의 해석과 더불어 새로이 주어짐 내가 받아들이며, 그때 그 새로운 의미를 (달라진) 나의 것으로 인수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담은 약속의 더 익숙한 형태는 이 불안을 부인하는 형태이다. "난 항상 여기에 있을게."류의 약속이 그것이다. 일단 이 글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았다.)
그러한 약속과 더불어서만 나는 감히 미래의 우리에게 편지를 부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그렇게 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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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물가감각이 수 년 전(정확히는 코로나 이전)에 머물러 있는 나는 독일에 몰락한 공업도시의, 창문없는 테라스를 가진 꼭대기층 집에서 우리말로 글을 올린다. 그래서 이는 내 말 속에 어떤 시차時差를 가정 하고 쓴 글이다. 물론 이는 어떤 면에서 원리상 가능한 말들일 뿐이며 그렇기에 모두 과도한 허풍이다. 나는 이곳에서 한국 미디어에 중독되어 있다(시차따위가 뭐람). 그럼에도 이처럼 허풍을 떠는 것에 변명을 하자면 블로그 장께서 지나치게 장엄한 제목을 달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못이기는 척 장단 맞춘 허풍이다.
암튼 이렇게 첫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