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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08.01 운명 by 알 수 없는 사용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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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tation to the Classical 2009. 9. 10. 00:31
얼마전 공지에서도 일렀지만 9월...가을이네요
한낮의 볕발은 심히 따갑지만 그토록 푸르고 높아진 하늘이라니
깊어진 강물위로  언뜻언뜻  거미줄같은  빛들의 편린이라니
눈길은 머언 어딘가로 향하고 마음은 불규칙적인 부침을 반복합니다
꺾어져 내려가는 길은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지요
돌아서면 만산홍엽의 시절이 도래할테고 그리고
겨울이 연말이 한해가 ...
수십년 겪어본 일이라고 생각은 채 닿지않는 시간에 다 아는 듯 서성이고  
지나간 시간은 돌아서면 정말 '과거지사'가 되는군요
지난 5월이 그리고 가깝게는 8월이  먼 옛사랑처럼 실체없는 실감으로 남는다는 것이
잘 믿겨지지 않아요
생각하고 추억하고 잊지않고 기리고 되살리고 
그러기엔 매 순간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 많은 일들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차근히 곱씹기에는
시간의 자락이란 너무 단단히 여며져 있어  그렇게 파노라마처럼 가버립니다 
그래서 그 많은 부당한 일들이 역설적으로 시간이라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안에 포섭되어 
있는지도요

그 즈음서부터 머리속에서 공전하던 생각..
누군가를 그리고 애도하는 것 
그러나 그 반향은 내가 우리가 외려 챙기는 거라는
 
가을은 부피와  밀도와 질량이 다 함께  상승하는 때인 듯 합니다
 다 그렇듯이 비우기 위한 작업이기도 한 것일거고요
때늦은 감도 있지만 계절이 주는 만감과 더불어
쉬 잊지 말아야 하는 것과 보내야  하는 것
간직할 것들과 솎아내야 하는 것들
그 무엇이 될 것인지 우리의 것들이 있겠고 각자의 것들이 있겠지요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2악장)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모짜르트의 Requiem
-포레의  Messe de Requiem  op.48

너무도 유명한 곡들이라 새삼 올리기가 송구하지만^^;
그 느낌들을 이 가을에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너무도 유명한지라 -아마데우스란 영화를 통해서 더더욱 알려져서리- 사설은 사족이 될테고요  다만 Philippe Herreweghe의 음반을 들을 기회가 있다면 새로운 경험이 될 듯~~
포레의 미사 레퀴엠도 같은 사람의 것을 들었는데요
참 나...
어찌 좋은지 원 --
더 좋은 것은 레퀴엠이니 미사곡이니 하면 일단 넘 길 것 같아 엄두가 나질 않는데 포레의 것은 길지도 않아 듣는 이의 부담을 깊이 배려한 소치가 아닐까~하는^^

아는 분들과 모르는 분들 모두 괜찮은 가을 맞이하시고 보내시길요~~

**말러의 교향곡은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이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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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5) 2009.08.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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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비가 많이 내린  여름이라고 하더군요.  두어 달 걸쳐있던 장마가 지나 가고 8월도 이제 중심이 뒤로 기울면서 한 해의 여름 정산을 서두르는 심정은 아마  더위에 지쳤기 때문일 겁니다.  왜 이리 세월은 속절없냐고 탄식하면서도 찰나에 불과한 한 계절 나기가 고달프다고 세월을 채근하다니... 인간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의 모순과 허물을 두고 서로를  인간적이라면서  인간적인 화기로 서로를 인정하나 봅니다 ^^(물론 제 경웁니다)

자주 산을 갑니다. 
산행하기 좋은 봄가을엔 인파로 지장받고 인적이 드문 한여름 한겨울 (한봄 한가을은 없지요~)엔 혼자만의 산속,  산길,  산아래 풍경, 그리고 걷고 또 걷는 행위의 반복성에 대한 성찰은 어렵지 않을지 모르나, 너무 더워 혹은 살을 에이는 삭풍에 예기치 않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절로 이르게 되지요.^^ 어느 쪽도 아쉽지만 또 어느 쪽도 나름 얻는게 없다고 할 수는 없네요.
정말 2009년 정점의 한여름을 관통하는 즈음입니다.  작열하는 뙤약볕 아래 무슨 수도승이라도 된 양 산을 올라갔지요.  달개비꽃이 산재해 있고 부용, 달맞이꽃,  능소화, 옥잠화, 배롱나무꽃 등이 찡그린 미간사이로 펼쳐졌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그 자리에 찔레꽃이나 붓꽃, 패랭이꽃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코스모스랑 구절초와 같은 가을꽃들도 기세가 등등합니다.  이건 뭐 계절꽃이 따로 없구만.. 지네들  피고 싶을 때 아무때나 나오고..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데 아파트앞 커다란 나무에 목련꽃이 피어있지 않겠어요?!  그야말로 요즘 누구 말로 대박...아무리 알아서들 하겠지만  8월에 목련이라.. 심한 거 아닌가요.  그러면서 연이어 드는 생각이 얘들도 먹고 살려니 힘드나 보다..  물론 나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상황이 투사된 것이겠지만 사람의 살이나 식물들의 살이가 혼돈스러운 건 매 한가진가 봅니다. 느닷없이 옛날 좋아했던 노래 한 귀절을  읊조렸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노래 전문^^)

암튼 정점이란건 올라간 도착점인 동시에  내려오는 출발점이란 면에서 여름과 닮은 것 같습니다.  더위에 지쳐 세상 돌아가는 꼴도 우거진 녹음과 만개한 꽃들도 찬찬히 들여다 볼 여력이 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곧추 내리쬐는 빛과 푸른 하늘이 없다면 어디서 살아갈 탄력을 받을까요.  아름답고 잘나고 빛나는 바깥세상을 보면서 사람사는 세상도 엇비슷하게 굴러가면 좋겠다.. 잠깐 드는 생각 흘러 보내고 화사하고 곱고 당당한 원색들의 향연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선율을 떠올렸습니다

멘델스존은 낭만주의가 왕성하던 무렵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없는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랍니다. 음악사에 족적을 남긴 훌륭한 음악가들이 불운했거나 병마에 시달렸거나 힘든 삶과 짧은 생애를 살았다면 멘델스존은  드물게 유복한 환경에서 맘껏 자신의 기량과 타고난 재능을 펼쳤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환경과 생애로 그의 음악엔 슬프거나 내면의 고독과 같은 애조가 없다고도 하지만 사람은 저마다  다른거니까요. 널리 알려진 짧은 소품 '노래의 날개위에' 만큼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나기도 정말 드물지요. 아름다움은 곧 슬픔과 동의어이기도 하지 않나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Op 64 
낭만주의곡들중 가장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 중의 하나이며 베토벤, 차이콥스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최고로 찬사 받는 곡이지요.  빠른 1악장, 느린 2악장 ,빠른 3악장의 전형적인 구성이지만 악장과 악장 사이가 음악적 스타일로 구분되어지지, 딱히 명시적으로 단락을 짓지는 않습니다.  현란한 기교로 분명하게 1악장의 대미를 끝내지만 바이올린 솔로가 먼저 끝나고 관현악 반주의 끝남과 동시에 바순의 저음이, 여전히 음악은 이어지고 있다는 듯 흐르고 있지요.  빠르고 느린 두 악장,  e단조와 c장조의 만남 사이에 적막하고도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다리가 놓여진 듯 합니다.   안단테의 2악장이 끝나고 다시 알레그로 비바체의 e장조 3악장이 시작되기 전에도  1악장과 같은 e단조의 -약간 빠른 템포의- 짧은 동기가  맛뵈기 하듯 나온 뒤, 저 유려하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함과 격조를 잃지 않는, 그리고도 쾌활하며 사랑스러운 3악장이 일사천리로 전개됩니다.  작곡가의 고양된 감정과  자유분방한 사상이 낭만주의의 구도 아래 잘 표현됐다고 봅니다.  3악장 맨 마지막 끝나기 바로 직전의 '솔솔 레레  미미도도~~~' 의 빠른 반복이 똑같이 6회  반복되면서 고조된 분위기가 아주 높은 미로 도약하는 바로 그 대목이 최고의 클라이막스로 느껴지는데 하이페츠의  소리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슬픈 운명에의 체념이라면, 오이스트라흐는 비록 안 될지라도 인간의 의지나  따뜻한 사랑으로  신념을 관철한  그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  타고난 천재성이 자신의 숙명인 양  처연한 차가움의 완벽한 기교로 하이페츠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공표했다면, 오이스트라흐는 거기 다가갈수 없을지언정  온기어린  결연함으로 멘델스존을 표현했다고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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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3) 2009.09.10
운명  (5) 2009.08.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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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7월 14일 파리의 군중들은 바스티유로 몰려갔고 3년 뒤 프랑스는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몇 달 뒤 루이 16세는 처형되었고, 무명의 포병 장교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독재자에 이르는 출세 가도를 걷기 시작하였다. 1792년 조지 워싱턴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었고, 괴테는 바이마르에서 공작의 극장을 감독하면서 광학에 관한 연구내용을 출판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그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모짜르트의 몸은 빈 공동묘지의 빈민묘역에 비명도 없이 누워 있었다. 1792년 11월 초 22세가 채 못 된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란 이름을 가진 야심적인 젊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가 라인 강에 있는 본에서 빈으로 승합마차로 1주일 걸리는 500마일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베토벤은 새롭고 강력한 힘이 인간사회에 팽배해 있던 역사적인 순간에 등장하였다......

살다 보면 누구나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러하다고 생각하기에- 의외로 지나치고 스쳐가는 일이 많습니다. 때로는 예리하게도 그 간극을 눈치채기도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아니 실제 바쁘기도 해서 그냥 갑니다. 어느 날 아주 드물게 시간이 나서, 혹은 사소한 계기와 맞닥뜨려 괜시리 자신에게 자신의 무심함이 미안했던 듯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다가 말짱하게 닫아뒀던 서랍을 열어 봅니다. 별게 다 나옵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하나의 성냥갑에서 그 까페의 이름과 들락거렸던 지난 시절과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헤어진 사연, 마침 그 때 옆자리에 있었던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자아내던 분위기까지 펼쳐집니다. 그 때 마셨던 커피맛도 재떨이에 쌓였던 담배꽁초들의 형상도,,, 그러더니 솔도 청자도 다 불려나옵니다. 그렇게 한 통속으로 사람의 머릿속과 가슴속을 유영하는 그 일련의 과정을 감지하는 또다른 자신도 여전합니다. 미토콘드리아와 시냅스의 활약은 눈부셔서  완전히 사장되었던 기억의 끄트머리조차 부활시키는 기능이 기막힙니다. 내친 김에 이것 저것 다 뒤집니다. 펼쳐지는 세계가 무한할수록 그러고 있는 나는 어느 순간 지칩니다. 다시 지금 여기에서 바쁜일에 대한 기억체계가 과거의 세계를 넘보기 시작합니다. 소기의 목적달성은커녕 일단 정리나 할까 하던 야심도 저멀리 사라져 갑니다. 약속시간 늦을까봐 얼른 닫아버립니다. 다음은 언제가 될런지 정말 기약없습니다... 그래도 하나쯤은 건졌다고 자위하기로 합니다. 잘 안다고, 그래서 우리는 아니라고, 안 가봐도 뻔하다고 잘난 척 했었는데, 다시 보니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그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정체불명입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잠깐 선회하기로 했습니다. 그 처음이 진정한 처음이기도 하지만 무작정의 처음만은 아니겠지요.

이 뜬금없는 변을 늘어놓는 것도, 정말 일천한 지식을 올리게 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요. 물론 블로그 열면서 '운명을 거스르는 자는 끌려간다'는 둥 자발성을 빙자한 그 누군가의 은근한 엄포가 만만치 않았음에요.
 
어린 시절 처음 들었던 <운명>의 1악장 첫마디, 너무도 익숙한 4음의 동기가 그리 강하고도 친숙하게 뇌리에 평생 박혀버리는 음악은 흔하지가 않지요.  이 4음의 동기는 다른 3개의 악장에서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계속 나옵니다. 베토벤은 항상 '나는 운명과 싸울 것이다. 운명이 나를 정복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그의 결의가 음악에 투영된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승리를 위한 투쟁은 c단조의 곡이 마지막 악장에서 c장조로 바뀌면서 선포됩니다. 3악장 단조에서 4악장 장조로의 전조는 스케르초에서 피날레로 중단없이 이어지는 영감적인 악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악장의 구별은 있지만 그대로 이어지는 파격적인 이 방식은 5번 피아노 협주곡 <황제>에서도 2,3악장이 구분없이 그대로 이어지는 데서 나타납니다.)  c장조로 트롬본이 전면에 나서는데, 교향곡의 경우 여기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병적인 '우수'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가 귀머거리인 데서 기인할 것입니다. 그의 유서라 불리는 편지를 보면 "이 절망이 얼마나 컸는지 나는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은 나의 예술이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순수한 즐거움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기적인 차이가 있지만, 그의 운명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이렇게 음악으로 살아남아 우리에게 너무나 값진 감동을 줍니다. 베토벤 이전 시대의 음악가들이 종교를 위하거나 후원자의 주문에 맞추거나 당시의 지배 계층의 이념이나 취향에 부합하는 음악을 만들었다면, 베토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다시 말하면 이상적인 보편적 청중을 위해 곡을 썼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또다른 특별한 감동을 주는 요인이 됩니다. 그의 양식이 독자적이고 주관적이긴 했지만, 그런 음악적 기술보다 오히려 혁명적인 요소, 자유, 충동적이고 신비하고 악마적인 정신 즉 음악이란 자기 표현의 한 방법이라는 것이 그의 기초 개념이었던 겁니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다시금 운명을  들어봤습니다. 다른 음악가들도 그렇지만 베토벤 음악도 특히 2악장을 귀기울여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3,4악장의 부단한 내면과 바깥의 밀고 당기고 길항하고 포용하다가 마침내 거듭나는 정신에 가슴이 벅찹니다. 그 전에 그가 자신의 내면적인 갈등과 그 깊은 심연을 헤매면서 얼마나 고독했다가 작은 발견에 기뻤다가 하는지, 그리고 그 길을 찾아가는 온 우주의 하나뿐인 자신으로 가는 세계에 얼마나 진지하고 고통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는지 겨우 알 것 같습니다. 그 험한 오솔길을 만들며 헤쳐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일 듯 말 듯 합니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 2악장과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빈 필 2악장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더 재미날 것도 같네요(너무나 많은 훌륭한 연주가들의 작품들은 말 할 것도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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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바이올린  (4) 2009.08.1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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