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트 만델이 탁월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범죄소설은  자본주의 사회의 충실한 반영이다. 범죄와 살인은 곧 사유재산과 그 주체인 개인에 대한 공격이며, 범죄소설이 이를 어떻게 다루는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직설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범죄소설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균열과 위기는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봉합되는가, 다시, 사회는 모든 개인에게 안전한 어떤 것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인가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셜록 홈즈, 그리고 이어진 명탐정 의 시대야말로 자본주의적 열정의 시대이기도..


고전 미스테리의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다시금 통합되어 문제없이 작동하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괴한 살인사건이라도 반드시 해결되고야 만다. 범죄와 살인은 한정된 사람들 사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현실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인공적인 퍼즐-수수께끼가 사건의 핵심이 되고, 또한 이를 합리적이고 냉정한 추리로 해결해가는 탐정이 존재한다. 기이한 연쇄살인, 수많은 피해자, 살인사건은 마침내 살인의 해결을 설명하는 탐정의 활약상을 위해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된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활약하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들에서 이 명탐정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사건의 전모와 범인을 밝혀낸다. 물론,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빼놓지 않으면서. 사실 긴다이치 코스케 뿐이랴, 에르큘 포와로, 파일로 번스, 엘러리 퀸 등 역사상 유명한 명탐정은 누구도 사건의 희생자를 구하지 못했다. 뻔히 그 시점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명탐정의 규칙>이라는 드라마-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원작이다-에서는 이를 재치있게 패러디하고 있다.) 

이는 부르주아적 이성의 승리라는 확신에 찬 드라마를 위해  범죄와 살인을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이다. 범죄와 살인은 사회의 일시적 흔들림이며, 위기일지언정 근본적인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설득. 퍼즐이 정교할수록 현실의 범죄가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가 안정적으로 통합될 수 없는 것임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범죄는 일상적임을, 사실상 사회가 안전하지 않음을, 살인이 넘쳐나고 있음을 외면해왔던 것은 확실히 자본주의 사회의 정신과 열정이 유효한 시대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범죄와 살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이며, 하나로 통합된 사회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범죄소설들은 결국 사회가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근본적인 균열을 지니고 있음을 증언할 수밖에 없다. 하드보일드 소설, 스파이 소설, 법정, 의학, 기업 등등의 다종다양한 분야의 스릴러 소설들, 미스테리 소설사는 이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집약된 자본주의 사회사이기도 하다.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1998), <아임소리마마>의 주인공들은 사회에서 내몰려 경계에 위치한 여성들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여성 주인공들이 구축한 놀랄만한 개성은 무척 흥미롭고(언젠가, 범죄소설들의 인물들에 대해서 쓸 기회가 있다면 꼭 빠뜨릴 수 없는 범죄자들이다) 역동적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주류집단에서 배제된 아웃사이더들이며, 소수집단이자 그로 인한 차별과 학대의 기억을 화인처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들이 놓인 경제적 계급을 명확히 드러내고 공들여 묘사한다. 저학력, 비정규직, 게다가 여성, 이들이 놓인 삶의 환경 자체는 범죄와 필연적으로 맞물린다. 고통과 빈곤, 겹겹이 쌓인 착취에 내몰려 생존 그 자체 이외에 다른 목적이 사라지는 이런 삶에서 살인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이 된다. 선 혹은 악, 범죄에 대한 감각은 생계, 혹은 하루의 생존으로 간단히 흡수되어 버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그래서 약한 자가 희생되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이미 범죄, 살인의 유무 혹은 경중, 즉 선과 악이라는 것은 가릴 수 없는 처지이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폭력과 학대, 착취의 고통과 우발적 살인 중 무엇이 더 나쁜지, 혹은 위법하지 않은 악의적 차별과 솔직한 증오 중에 무엇이 더 범죄적인지? 여기서는 결국, 인간이란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가차없이 희생되는 짐승의 세계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매일이 그러하듯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결코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기리노 나쓰오 소설에서 가족은 박살났으며, 오히려 상처의 근원, 살인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런 점은 (사실 전혀 다른 소설인데도) <미스틱 리버>(2001)가 공유하는 지점이다. 데니스 루헤인이 창조해낸 치밀한 캐릭터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세 사람은 그들 각각의 고통과 상처가 어떠하든, 약한 자는 희생되고,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는 점을 충실히 보여준다. 선과 악이 더 이상 명확히 구분가지 않는 세계, 범죄와 살인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세계, 약점이 보이면 가차없이 먹잇감이 되는 세계. 살아 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빈곤한 노동계급의 삶에서 탈출하여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신분상승을 이루고 여피들의 세계에 진입하여) 고급 주택가 거리로 이동하든지, 누구도 만만하게 볼 수 없을만큼 강해지든지. 

그러니까, 이미 법 혹은 정의, 인과응보 혹은 선이 보답받는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얄팍한 것이나마 날것 그대로의 범죄와는 거리가 있는 여피들 혹은 중산층의 세계에나 통용되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 그 자체가 전쟁인 하층 노동계급의 삶 속에서 범인이라고 해서 나쁜 놈만은 아니며, 살인이 그저 단순히 악한 것만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연약하고 순진한 것은 희생될 수 밖에 없으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이겨내고 살아서 귀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읽는 이들은 그래서, 범인에게 이입하고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미워할 수 없는 괴물같은 살인범. 그들은  어쨌든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강인한 자인 것이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법은 무력하며, 희생자는 가엾게도 그 죽음을 보상받지 못한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 범죄소설이 다다를 수 밖에 없는 지점이다.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살아남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은폐할래야 은폐할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모든 가치와 삶이 생존으로, 살아남는 것으로 환원되는 세계는 출구가 없다. 이 소설들은 명확히 이것이 바로 빈곤계급의 삶이며, 사회가 명확히 계급적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리지만, 동시에 어떤 해결책, 어떤 대안도 없다고 뚜렷하게 선언한다. 도대체 계급의 이동, 다른 세계로의 탈출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위협, 삶의 불안정은 다름 아니라, 당신이 설혹 이 세계와는 무관한 중산층일지 몰라도, 언제 실업으로 혹은 채무로 인해 바로 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어쩌란 말인가, 바로 그러한 이유로 무엇보다 강한 자에 대한 은밀한 매혹이 중심에 서게 된다. 어떻게 되든, 강해져야 하며, 어떻든지 간에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 범죄와 살인은 약육강식의 드라마이자, 약자와 강자의 치열한 게임이 된다. 누구도 왜라고 묻지 않는 세계에서 어떻게 버틸 것인가의 문제. 이 시대의 범죄소설은 사회의 분열을 보여줄지언정, 그것으로 더욱 철저한 무력감을 안겨준다. 이를테면, 냉소. 이미 이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테니까 알아서 조심하도록 해...라는 식의.  

미스틱 리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로 만들어 숀펜과 팀 로빈스에게 아카데미 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잘 어울리지 않는가. 이 소설이야말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화할만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강자와 약자는 가족의 가치를 수호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대응한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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