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4 이전 글들/문화의 모든 것

Wandern에 대하여

by vinoveri 2009. 5. 16.

Wandern은 제가 좋아하는 독일어 단어 중 하나입니다.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행(특히, 도보여행)이나 방랑, 혹은 유랑 등의 뜻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뜻 말고도, 이 단어는 편력(遍歷)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력이란 흔히 이곳 저곳을 두루 돌아다니거나 여러가지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하지요. 오늘날에는 다른 데서는 잘 쓰이지 않고 남자가 여자 경험이 많을 때, (혹은 여자가 남자 경험이 많은 경우에) "그 xx, 여/(남)성편력이 되게 심해"라고 말하는 데 주로 쓰이지요.ㅋ

(이런 의미로 쓰인 경우로, 박노해의 "남성편력기"라는 시가 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건전한' 남성편력을 다룬 시입니다.ㅋ 오늘날의 시대적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시이긴 합니다만, 혹시 읽어본 적 없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지요.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세에는 도제가 독립적인 장인(마이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련여행을 거쳐야 했고, 이와 같이 수련생이 자기가 배울만한 장인을 찾아다니며 수련여행을 하는 것을 편력이라고 했습니다. 상상력을 좀 가미해서 이야기하면, 어떤 욕심많은 수련생은 어디에 훌륭한 장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곳을 찾아가서 사사를 받고, 또 그 과정이 어느 정도 끝났다 싶으면, 또 다른 장인을 찾아가고.. 장인이 될 때까지 이런 과정을 반복하기도 했겠지요.

Wandern은 이 과정을 가리키는 독일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앞에서의 방랑이나 유랑의 의미로 이야기할 때와는 어감이 상당히 다르지요. "여성편력"을 이야기할 때의 편력과도 많이 다르구요. 정처없이 방황한다는 느낌보다는 확고한 지향성을 가지고 뭔가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강한 듯하고, 또 계속해서 뭔가를 배워나간다는 의미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뜻에서 보면, 도를 깨치기 위해 면벽수도도 하고 도사님도 찾아가는.. 동양적 이미지와도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도 역시 쉽게 깨치기가 힘들어 그것을 깨치기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하는.. 뭐 그런 것으로 생각되지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뒷편으로 쓰여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 편력시대의 원어는 Wandjahre입니다. 위에서 말한 "Wandern"의 의미가 드러난 제목이지요. 흔히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연작을 교양소설이라 부릅니다. 이 교양소설이란 말의 원어는 "Bildungsroman"인데요, 여기서 "교양"에 해당하는 말인 "Bildung" 역시 오늘날의 교양이란 말이 가진 어감 - 예컨대, "그 여자, 참 교양있는 여자야"라고 말할 때와 같은. 근데 이 말은 뭔가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하고 비슷한 것같지 않나요?ㅋㅋ - 과는 달리, 위에서 말한 "Wandern"의 의미와 상당히 통하는 바가 있지요. 헤겔의 책에서도 "Bildung"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용어로 쓰이는데요, 이 말은 교양보다는 "도야"나 "성숙" 혹은 "문화"로 번역하는 게 훨씬 뜻이 잘 통합니다.

(빌헬름 마이스터도 그렇지만, 괴테에게는 이런 모티프가 강하게 드러나지요. 파우스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Es irrt der Mensch, so lang er strebt)"인 것이구요.)

하지만, 제 생각에 이 글의 내용과 보다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가곡 "Wandern"이 있습니다. 이 곡은 슈베르트의 연가곡(連歌曲)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에서 첫 곡으로 쓰인 노래입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는 물방앗간에 취직한 한 청년이 그 집 딸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집 딸은 잘 생긴 사냥꾼을 좋아하는 관계로 실연의 상처를 견디지 못한 이 청년이 자살한다.. 뭐 이런 이야기를 담은 20곡의 연가곡으로 이루어진 작품인데요. 전체 줄거리는 뭐 별게 없지요? 좀 뻔한 이야기구요..ㅋ

암튼 이 연가곡집의 첫 곡으로 만들어진 곡이 바로 "Wandern"입니다. 이 곡은 전체 이야기의 시작으로 편력을 떠나는 주인공 청년이 이 편력에 대해 가진 기대와 희망을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슈베르트의 일반적 이미지와는 달리, 밝고 희망찬 분위기를 가진 노랜데요, "Wandern"이 가진 의미와, 또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물과 물레방아와 돌에 비유하며 힘차고 경쾌하게 노래합니다.("O Wandern, Wandern, meine Lust, o Wandern.")

(물론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전체의 이야기는 이 첫곡의 느낌과는 다르지요. 좀 신파에 청승스럽기도 한게.. 상당히 '슈베르트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요.ㅋ 저한테 슈베르트는 뭐랄까요, 좀 지나치게 예민하고, 좀 신경질적이면서, 그래서 좀 궁상맞기도 한.. 하여간 아주 섬세하지만, 좀 '센치'한 시인같다고나 할까요, 암튼 그런 이미지입니다. 노다메는 슈베르트보고 "사귀기가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지요.ㅋ) 

이 곡은 흔히 "방랑"이라고 번역되는데, 사실 "방랑"이라는 말은 이 곡의 내용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여기서는 위에서 말한 의미로 "편력"이라 말하는 것이 훨씬 적당하지 않을까 싶네요. 근데, 또 "편력"이라는 말이 좀 딱딱해서 시적인 느낌을 주는 데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긴 하지요. 암튼 그래서 이걸 "방랑"이라 번역하든, "편력"이라 번역하든, 이 곡을 감상할 때는 위에서 얘기된 의미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슈베르트의 잘 알려진 다른 작품 중에서 "방랑자 환상곡"이란 곡도 있지요. 여기서 방랑자에 해당하는 원어도 "Wanderer"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Wandern"의 느낌은 그저 정처없는 방랑에 더 적절하지요. 암튼 슈베르트에게는 여행, 방랑 등의 모티프가 많이 나타납니다. "겨울나그네"도 그렇구요..) 

암튼 제가 좋아하는 노랜데요, 같이 한번 감상해보시죠. 링크를 걸어놓겠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ezGI9VySkfk

가사가 올라와 있는 곳도 많이 있으니 가사를 한번 일독한 후에 감상하시면 더욱 좋을 것 같구요. 참고로, 이 노래의 피아노 반주는 냇물의 흐름을 표현한다는군요.

이상 Wandern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분들이 많아서 몇자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