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k Ruda, "놓아줌Entlassen. 헤겔, 희생, 해방에 관하여"
<논문 번역> "Entlassen. Remarks on Hegel, Sacrifice and Liberation", in Crisis & Critique, Jun., 2014 , pp.111-129.
예비작업 : 운명론에서 희생으로
[111] 이하 언급되는 내용은 내가 다른 곳에서 발전시킨 것, 즉 오늘날 숙명론을 옹호할 필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옹호의 동기는 자유에 관한 문제적 이해理解를 분석하면서 획득되었고, 이러한 분석은 특히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 의해 정식화되었다. 이 저자들이 비판하는 자유에 대한 문제적 이해의 결정적인 특징은 자유를 능력capacity으로 믿는다는 것에서 구체화된다. 데카르트 및 다른 이들은 그러한 이해의 현상적 효과를 무관(심)한 상태state of indifference로 개념화했다. 요컨대 진단은 다음과 같다. 자유가 나의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자마자 나는 나 자신의 구성constitution에 대해 무관(심)해 진다, 곧 동어반복처럼 들릴지라도 나는 나의 자유에 무관(심)하게 된다. 나는 이 이해에 반대하면서 데카르트의 마지막 출판물인 <정념론Passions of the Soul>에서 나타난 주장을 옹호하려고 했다. 거기서 데카르트는 그러한 무관(심)함의 상태―말하자면, 주저함(=미결정; indecision)의 순간에 붙들려 있다면―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운명론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자유로워지기 위한 선제조건은 자유가 단순히 자신의 위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역자강조). 자유가 있거나 앞으로 있을 것이라면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성되고 산출되는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역자강조). 모든 것이 이미 완전히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비록 지금도, 앞으로도 어떻게 그러한지를 결코 우리가 알 수 없다하더라도―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마음의 성향을 숙명론적이라 부르며, 이 성향은 자유가 나의 능력임을 가정하는 관념론적 입장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겨냥한다. 숙명론은 자유가 내가 행할 수 있는 것이라는 나의 사고를 유예 한다. 이로써 데카르트는 나에게 우연히 일어난 어떤 일을 내 자유의 선제 조건으로 받아들이라고, 다시 말해 우연성이 필연으로 바뀌는 완전히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일견 이것은 자유의 폐지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데카르트에게 그것은 자유의 폐지, 능력으로서의 자유의 폐지이다(역자 강조). 나는 자유롭기 위한 이 선제 조건을 슬로건으로 분명히 표현했다. ‘우리는 마치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행위해야 한다.’ 마치 내가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행위할 때—숙명론자가 될 때—, 나는 내 능력으로부터 도출할 수 없는 바로 그 규정the very determination을 긍정하게 된다. 곧 자유를 추구할 때 나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관되게 옹호될 수 있고 그것이 일관적인 자유 개념을 기술한다면, 자유는 필연적으로 희생 행위를 함축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논구할 물음은 다음과 같다. 이 희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112] 이하에서 나는 자유와 능력 간의 동일시를 폐지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뒤따르는 물음을 다룰 것이다. 이 폐지의 이름이 바로 —내가 주장하려는 바에 따르면— 희생이다.
“희생한다는 것은 자연성, 즉 타자성을 지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
“세상이 절대적으로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존중해야 할 사물의 본성도 시인해야 할 미리 형성된pre-formed 주체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개인이 희생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바디우)
* Cf. Ruda 2014.
2. 희생을 희생하기?
먼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자. 오늘날 해방 사상을 위해, 그리고 해방적 사상 안에서 희생의 관념이나 개념, 실천을 이용할 수 있을까? 또는 더 근본적으로 말해, 희생이 일관된 자유 개념에 중요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지 “아니다”라고 보일 수도 있다. 이 개념에는 가능한 아무런 소용이나 기능이 없다. 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향수鄕愁나 심지어 우울증적 입장에 빠질 수도 있다. 즉 적어도 영웅적인 해방의 행동이 가능하다고 여전히 생각할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때 이 영웅적 행동은 항상 어떤 희생적인 제스처를 의미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아마도 이것이 혁명가만이 아니라 모든 해방 이론가에게도 해당되었을 것이다. 과거, 맑스의 <자본>에 대한 알튀세르의 다음 주장은 이러한 맥락에 위치한다. “<자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맑스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며, 1850년 이후 그의 전 생애를 바쳤고 쓰라린 고난 속에서 그 자신과 가족의 존재의 더 나은 부분을 희생한 작품이다.” * 하지만 모든 향수는 오래전 사라진 과거를 이상화하기 때문에 지금의 해방 사상에서 별 가치를 갖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향수를 앓는 사람은 과거에 살고 있으므로 현재와 적절하게 관계하지 못한다.
* Althusser 1971, 71.
그러나 단지 해방 사상에서 희생의 가치를 묻는 것일 뿐이더라도 그 물음에 우울증적 입장이 함축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더 나쁜 경우이다. 이 말은,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지만 영웅적이었던 시대에 대한 그토록 향수어린 관념이 그 자체로 반동적 환상일 뿐이며, 곧 오늘날의 관점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축된 환상일 뿐임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읽으면 그러한 [우울증]자는 본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복원하고 부활시키려는 자가 된다. 만약 [113] 이것이 맞다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웬디 브라운Wendy Brown *과 최근 조디 딘Jodi Dean이 ‘좌파의 우울left wing melancholy’이라고 부른 것 ** 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가 설명한 우울증과 애도 사이의 구별을 떠올려야하며 이는 조디 딘이 역시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울증자는 애도에 없는 어떤 것을 추가적으로 보여준다. 곧 [그에게는] 자기애/자존감self-regard의 놀라운 감소, 에고의 엄청난 빈곤화가 나타난다. 애도에서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은 세상이다. 우울증에서는 에고 자신이 그렇게 된다.” *** 애도에서는 애도되는 대상의 상실 때문에 세상이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서는 어떤 상실로 인해 주체 자신이 공허해진다. 그러나 우울증자가 관계하는 상실은 그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다르게 기능한다. 심지어 우리는 우울증자의 “리비도는 실제로 아무것도 잃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실이 발생한 것처럼 행동한다. ... 왜냐하면 아마도 상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우울증자는 무언가를 잃었으며, 프로이트가 주장하듯 그것은 “그의 자기존중self-respect”이다 *****. 그리고 정신분석에서 항상 그렇듯 이것[자기존중의 상실]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는 우울증자가 이해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는다. 따라서 우울증자는 자신이 허위, 오류, 배신을 범했다고 믿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감시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디 딘은 좌파적 우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칭 좌파적 해방 이론 및 실천은,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해방적이며 평등주의적 투쟁에 대한 신념을 (우울증에 연관된 조증mania처럼) 끊임없는 활동으로 대체했으며, 그리하여 이제는 비판과 해석, 작은 프로젝트 및 지역적 행동, 특수한 문제들과 입법에서의 승리에 ... 만족하고 있다.” ******
* Brown 1999.
** Dean 2013.
*** Freud 1957, 245
**** Agamben 1993, 20.
***** Freud 1957, 246.
****** Dean 2013, 87.
따라서 이러한 좌파 이론 및 실천은 자본주의와 그 오늘날 체제organization 형태인 의회 민주주의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딘이 브라운에 따라 계속해서 주장하듯, 자기존중이 상실되는 이유는 (해방에 대한 신념 같은) 신념들이 정확히 칸트의 정언 명령처럼 기능하며, 다시 말해 [114] 그 신념들이 경험적 변명으로 신념을 위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법 앞의 평등에 대한 신념을 가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신념을 실천적 고수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경험적일 뿐이므로 정당한 변명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전체주의, 권위주의, 독단주의, 유토피아주의, 도덕주의, 심지어 폭력 등과 같은 좌파적 비판의 표어 전체는 바로 이점을 가리킨다. 이 말들은 전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정적으로 묘사할 뿐이며, (비非-)행위 영역을 부정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인 신념을 구현하고 있다. 이들 모두는 해방을 위한 헌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결국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해방을 위한 헌신에 위험이 내포되어 있음(예를 들어, 현재 시스템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해방을 위한 폭력 사용을 옹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울증적 좌파는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데, 그것은 —그들은 종종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저 해방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검토하고자 하는 개념인 희생은 여러 의미에서 우울증적 좌파의 거의 모든 표어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악명 높다. 그것은 권위주의, 독단주의, 엄격주의, 도덕주의 등에서 특정 역할을 한다. 이 모두는 더 높은 대의를 위한 희생의 계기가 있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독자가 이하에서 기대해야 할 것은 향수어린 검토도 아니고 우울증적인 검토도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오늘날 해방 사상의 우울증적 ―혹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입장을 극복하고자 할 때, 좌파의 입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고 오염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범주들과 직접 대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가 따르는 생각이다(역자 강조). 이하의 내용은 해방 사상에서 희생의 가치를 새롭게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내 생각에 오늘날 대다수 자칭 해방적 입장에 대한 적절한 규정으로 보이는) 이 우울증에 대해 해독제를 제공하려는 시도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독단주의, 권위주의 등의 위험을 수반한다. 이것은 우리가 기꺼이 감수해야 할 위험이다.
3. 새로운 잉크 발명법
희생이라는 관념이나 범주, 그리고 희생의 행위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슬라보예 지젝이 여러 번 사용했던 농담*에 의지하여 시작할 수 있다. 한 독일 노동자가 스탈린주의 시대에 시베리아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그는 떠나기 전 친구들에게, 자신이 예상하기에 검열관이 자신의 모든 편지를 읽을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검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의 [115] 계획은 써놓은 말과자신의 생각이 같은 것은 파란색으로 쓰고, 나머지는 빨간 잉크로 쓰는 것이었다. 한 달 후 그의 친구들은 시베리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든 사람들, 특히 장교들이 얼마나 좋은지, 다른 모든 수감자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고된 육체 노동과 운동의 긴 날들을 보내고 나서 자신이 훨씬 더 건강하고 살아있다고 느끼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첫 번째 편지를 받는다. 그는 생활 방식과 새로 들어온 문하생에 매우 즐거워하고 있며, 한 가지 없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은 완벽하다. 곧 빨간 잉크가 없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 Žižek 2006, 141.
이 농담은 종종 어떤 상황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표현하는 말, 언어가 불가능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관건은 상황에 나타난 모순과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때때로 관건은 그것들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대처법에 대한 물음이 생겨난다. 오늘날의 상황을 이런 식의 틀로 보는 것은 상당히 적절해 보인다. 따라서 대답해야 할 물음은 다음과 같다. 현재 상황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어 밖으로 나와 있지 않은inexistent 것을 표현할 언어를 발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이 물음에 전혀 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 취급에 관해 최소한 한 가지 유형의 제안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확히, 정치적으로 잘못된 반동적 측면에 대해 완전히 둔감한 범주나 관념들을 참조하는 것이다(역자 강조). 예를 들어 알랭 바디우는 규율Discipline 범주를 다시 흡수했다. 규율은 직접적으로 권위주의를 수반하는 것처럼 들리며, 정확히 해방적 사유가 가능한 한 피해야 하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정치적 갈래에 둔감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디우가 설득력 있게 주장하듯이 개념 자체에는 반동적인 것이 없으며 오히려 반동적인 편에서 재전유되었을 뿐이다(역자 강조). 우리는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는 규율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조직할 아무런 물적 수단이 없다 해도 엄밀히 말해 우리는 아무런 가망 없이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다. 이 장애로 상정된 것을 극복하게 도울 수 있는 것이 바로 규율이다. 이때 바디우의 전략은, 말하자면 잘못 착색되었기 때문에 실효失效된 것처럼 보이는 범주 중 하나를 해방을 재사유하기 위해 받아들이는데 있다. 동일한 논리 하에서 바디우는 또한 [116] 정치에서 새로운 주인a new master이라는 지도자에 관한 범주를 취한다**. 분명하게 떠오르는 이 전략의 또 다른 제안자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은 여러번 이러한 전략적 조처를 취했다. 예를 들어 메르켈Angela Merkel이 이민자 통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주류문화Leitkultur의 필요성을 주장한 후 지젝은 '주류문화'라는 용어를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말고 —분명히 속속들이 반동적으로 들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좌파적 주류문화가 될 수 있는 것에 대해 분명히 표현하자고 제안했다***.
* Badiou 2008.
** Badiou / Roudinesco 2014.
*** Žižek 2011.
이러한 전략은 바로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토대에 위치한 제스처를 개량revamp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근본적 조처[곧 위의 제스처]가 무의식의 발견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새로운 빨간 잉크를 발명하는 것이라고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입문 강의>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심리적 자유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환상” *이라고 명명하는 것[사태]에 반대하면서 —이는 명백히 내가 처음에 언급한 데카르트의 숙명론 논의를 반영하는 지점이다— 이 제스처의 범례를 제공한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만일 자유와 결정론 사이에 선택할 수 있는 경우, 자신과 같은 적절한 합리주의자라면 누구나 결정론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를 때 이것이 올바른 전략인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이트의 상황에서 심리적 자유에 대한 주장은 그 자체로per se 합리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심리적 자유 주장은 기본적으로, 어떤 일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있을 수 없다는 논제가 된다. 간단히 말해 프로이트는 이것이 모든 합리주의적 입장을 직접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합리주의를 피하기 위한 프로이트의 제안은 자유와 결정론 사이의 선택이 있을 때 먼저 결정론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결정론을 선택한다는 것은 인간 정신에 결정되지 않았거나 그 자체로 설명할 수 없거나 비합리적이거나 관련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직접적인 귀결은 인간의 정신에는 덧없는 것은 없다는 것, 모든 것이 동등하게 효력을 가지며 동등한 주의를 요한다는 것이다. 곧 겉보기에 더 중요해 보이는 것뿐 아니라, 실수parapraxes 역시 설명되어야 한다. 더 엄밀하게는, 인간 주관성의 핵심으로 직접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수 현상이다. 이로써 프로이트는 주변과 중심 사이의 위계를 뒤집을 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에 대한 설명에서— (정당화를 통해) 존재한다고 말해지는 것과 [117]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도 뒤집는다. 이것은 새로운 빨간 잉크의 발명이다. 이 모든 것은 자유와 결정론 사이에서 행해지는 원초적primordial 선택에서 파생된다. 이는 비판과 해방의 새로운 언어인 새로운 잉크의 발명은 (다소간 직관적으로 볼 때)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참된 것의 출현은 오로지 겉보기에 거짓으로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 Freud 1961, 49.
** 명백하게도 이 논증은 궁극적으로 헤겔적인 것이며, 슬라보예 지젝이 여러차례 주장했던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바디우는 하나의 근본적 선택이 오늘날의 상황을 구획 짓는다고 제시했다. [한편으로] 주체는 그들의 신체와 완전히 동일하며 따라서 주체의 모든 행위의 유일한 목표는 향유(체현된 향유 및 인권과 같이 특정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향유)이거나,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 주체와 신체는 분리되며 따라서 신체는 희생될 수 있고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 사이의 선택이 그것이다*(역자 강조). 그가 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주체와 그 몸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측면에도, 그들 사이의 외적이고 초월적인 차이인 완전한 분리의 측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그가 보기에 이것이 오늘날 예술과 철학의 과제이다. 그는 이것을 내재적 차이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제3의 패러다임을 창출하려는 그의 시도는 새로운 빨간 잉크의 발명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내 생각에 오늘날 이 패러다임을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향유와 희생 사이에 선택이 존재하는 경우 프로이트의 방법에 따라야 하며 바디우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 선택을 변증법화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희생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 Cf. Badiou 2006.
4. 영웅과 노동자들에 관하여
우리는 희생이라는 개념 자체에 새겨진 독특한 역설을 지적함으로써 이를 발전시킬 수 있다. 과거 체 게바라의 영웅적 주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위 혁명가들은 …… 일상적인 작은 애착만 가지고 보통 사람들이 애정을 쏟는 수준까지 내려갈 수 없다. 혁명의 지도자들에게는 이제 막 말하기 시작한, “아빠”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도 않은 아이들이 있다. 혁명을 운명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아내조차 그들 삶의 보편적 희생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들의 친구들은 [118] 혁명 동지들로 엄격히 제한된다. 혁명 동지라는 범위 바깥에는 아무런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
* Guevara /Castro 1989, 25.
게바라에게는 평범한 삶 및 그 즐거움의 희생이 모든 해방자의 삶을 구성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해방을 생각할 때 더 큰 선善을 위해 평범한 삶을 희생하는 그러한 희생적 입장은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역사에서 배운 것은 더 높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 (이기주의의 마지막 요소를 제거하더라도) 언젠가는 분명히 대의 자체를 희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희생 행위, 즉 희생하는 주체 자체를 신성한 존재로 만드는 행위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 보인다(역자강조). 오늘날, 고전적인 혁명적 영웅주의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 끝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해방에 대한 다른 이해, 아마도 최근에 존 할러웨이John Holloway가 제안한 이해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는 <권력을 잡지 않고 세상을 바꾼다Change the World Without Power>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공산주의 운동은 반反영웅적이다. 영웅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두드러 진다 ... 전통적 혁명은 혁명을 위해 희생한 사람인 영웅들로 가득하다 ... 누구도 그러한 인물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지만 ... 혁명의 목적은 평범한 일상의 변혁이며, 혁명이 발생해야 하는 자리는 분명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다 ... 혁명가 되기는 매우 평범하고 매우 일상적인 문제라는 가정, 비록 우리 모두가 매우 모순적이며 물신화 되고 억압적 방식으로라고 할지라도 혁명가라는 가정에서 출발할 때만 혁명을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다 ……”*
* Holloway 2002, 129.
이는 희소식처럼 들린다. 우리는 이미 모두 혁명가이고 평범한 삶은 혁명적이며 따라서 희생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 평범한 행위는 다가올 진정한 해방에 충분한 배경[곧 충분조건]을 제공한다. 희생 없는 해방이라는 비영웅적 선택지에 반대할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 단지 일상의 활동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는 명백한 위험을 논외로 하더라도, 일상 활동을 궁극적으로 혁명적인 것으로 지각한다는 점 자체가 더욱 반대할 이유가 된다(역자 강조). 해방이 일상생활의 구조자체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이미 혁명가이기 때문에) 단지 우리 자신이 되기만 하면 충분하다면, 현대 사회의 누구의 일상에도 (게바라의 이해와 달리) 영웅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것인 희생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리고 할러웨이조차도 [119] 이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물신화되고 억압된 방식”으로 혁명가라는 점에서 이러한 방식에서 혁명가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억압을 수반하는 것이다(역자 강조). 이에 대해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혁명가가 된다는 것은] 혁명의 이념 자체의 희생(좌파적 우울증)을 수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명시적으로 말한다면, 영웅주의를 피하고 일상을 직접적으로 끌어안는다면, 정확히 해방이 아닌 일상으로 이어질 것이다(역자 강조). 게바라가 향유와 희생 사이의 선택에서 희생을 선택했을 때 그의 취지는, 혁명가란 자신의 육체적 욕망과 직접적인 동경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보통의 인간 기능에서 빠져나오면서de-functionalize 자신을 그 기능과 동일시하지 않으며, 주체와 신체의 차이를 강조한다. 그러나 오늘날 희생 아니면 향유가 오늘날 선택지라면, 향유를 직접 선택하는 것의 함의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청년 칼 맑스가 자본주의의 모든 향유 유형에 대한 사회적 조건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사람들이 더 많은 돈(즉 향유 수단)을 “벌고자 할수록 자신의 시간과 자유를 더 많이 희생해야 한다...”* 라고 말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는, 바로 일상적 행위를 실체화함으로써 희생적 행위의 영웅주의를 길들임에 있다.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비-영웅적 개인이 단순히 희생적 행위의 압력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 자신인 단지 일상인이 되기 위해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것은 희생한다(역자 강조). 영웅적이지 않은 희생이 지닌 문제점은, 영웅주의가 시대에 단지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고 희생 행위가 오래 전 과거의 유물로 간주되는 세계(그것이 하나의 세계라면 말이다)에서 이 [비-영웅적] 희생이 매우 잘 일어난다는 것이다.
* Marx 1975, 284.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다음과 같은 말로 유사한 것을 주장했다. “돈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은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경제위기라는 허수아비를 흔들어 대는 뻔뻔스러움 보다 더 역겨운 일은 없다. 요즘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를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고 경고하기 위해 누더기 같은 수수한 옷을 입는다.”* 그리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도 계몽의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이미 비슷한 것을 지적했다.** 그들은 자연의 –신화적인– 위력에 맞선 이성의 투쟁에서 어떻게 끝없는 영웅적 희생(배 위의 오디세우스를 생각해 보라)이 요구되는지를 분석했다. 그러나 신화적 희생이 희생될 때[곧 영웅적 희생을 통해, 그 희생이 불필요해진 계몽이 도래할 때] 실제로 희생되는 것은 바로 자아의 관념이다. 자아 자체는 호르크하이머가 도구적 이성이라고 부른 것을 초과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수반하지 못한 채 [120] 이성의 빈껍데기가 된다***(이것이 바로 우울증이 보편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좀더 변증법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신화적 희생의 모델을 극복하기 위해 애쓸 때, 계몽은 신화적 희생을 희생시키려고 시도함으로써 제거하고자 했던 희생의 논리를 되풀이한다. 희생을 희생시키는 것은 여전히 희생이다. (할러웨이처럼) 혁명에 관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것도Wanting the revolutionary cake and eating it 역시 선택지가 못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희생적 영웅주의 (희생 주체의 신성화를 수반하며 그에 따라 주체와 신체의 분리라는 초월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입장) 아니면, 영웅을 만들지는 않으면서 일상의 구조 자체에 스며든 것으로 드러나는 희생(주체와 신체의 완전한 동일시)이라는 선택지가 남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해방은 희생의 요구를 함축한다고 하는 게바라적 선택이 적용되거나, 아니면 1퍼센트의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이가 지속적으로 희생해야한다고 하는 마르크스와 아도르노의 비판이 적용된다. 곧 우리는 자발적으로 희생하거나 비자발적 희생의 희생자로 밝혀지는 것이다. 정치에서 영웅적 형태의 희생적 제스처든 사회에서의 경제적 생존 법칙이든 그것[주체]의 희생을 요구한다. 제3의 길은 없어 보인다. 주체적[곧 자발적] 희생을 동반한 정치적 해방에 대한 긍정이 있거나, 아니면 아무런 해방 없이 어떤 식으로든 지속되는 주체의 [비자발적] 희생이 있는 것이다.
* Agamben 2000, 132.
** Adorno / Horkheimer 2002, 35-62.
*** Cf. Horkheimer 2013.
5. 희생의 방식들. 마리옹, 지젝
때때로 이 딜레마에서 잠시 뒤로 물러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상이한 희생 방식을 개괄해야 한다. [이는] 이 [희생] 개념을 언급할 때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이다. 장-뤽 마리옹은 (적어도 몇 가지 유형을 추가적으로 보충해 준다면) 교훈적인 것으로 드러날 개략적인 현상학적 희생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 개념에 대한] 그의 개괄이 교훈을 주는 이유는 오늘날 신神 없는 사회(나는 여기서 이 점에 대해서는 제쳐둘 것이다) 내에서의,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 대한 희생의 역할을 그려내려하기 때문이다. 마리옹은 세 가지 주요 희생 방식을 구분한다. 첫째, 순전히 부정적이고 파괴적 양상의 희생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일상의 기능주의functionalisms를 깨뜨리려는 투박한 파괴행위 형태로 오늘날 나타난다**(역자 강조). 그러나 그것은 또한 [121] 자아의 모든 물질적 측면을 희생하는 금욕주의 형태도 취할 수 있다―이 주장에 따르면 진정한 자아는 외면적 기능을 넘어 그 바깥에 있다.*** 이 첫 번째 희생 방식은 희생을 통해 주체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곧 나는 어쨌거나 필요하지 않은 비기능적인 것들을 제거할 뿐이다(역자 강조).
* 나는 Žižek 2012, 50쪽 이하에서 지젝이 인용하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마리옹의 수고를 참조하고 있다
** 예를 들어 9.11의 폐허를 성스런 대상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 오늘날 이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자연과의 일치에서 찾으려는 관념에서 볼 수 있다.
마리옹이 설명하는 두 번째 방식에서 희생은 선물로, 하지만 조건 하에서 선물로 기능한다(역자 강조). 우리는 무언가를 돌려받기 위해 시간, 에너지, 노동, 친구와의 만남 등을 희생한다. 희생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나 일종의 약속된 상징적 자본을 돌려받기 위해서 말이다*(역자 강조). 여기서 희생은 마르크스에서와 다소 유사한 방식으로,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원칙이 된다. 따라서 희생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성의 경제를 확립”한다(Marion)**. 이러한 희생유형의 암묵적 규칙은 교환이다(역자 강조). 마리옹이 보기에 이 두 번째 방식의 문제는 그것이 희생의 본래적 차원을 폐기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희생 행위 자체에 도구주의적 추론을 들여오고 (첫 번째 희생 방식에서 설명된) 희생의 기능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희생은 일상을 탈기능화하면서 일상의 기능주의적 세계로부터 어떤 것을 뽑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희생이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교환 모형이 되어버리면 희생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 모형에서 우리가 보상을 기대하고 따라서 교환의 논리에 의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희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면, 이와 더불어 첫 번째 금욕주의의 판본 역시 희생 자체를 무화시킨다는 통찰도 나타난다. 왜 그러한가? 자신의 재산을 희생한다고 해서 본질적인 것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그것이 자신의 생명이라 해도―을 단지 버리는 것이다.
* 이 점에 관해 우리는 현재 독일 대학 구조에 만연한 인턴십internship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베를린 훔볼트大는 치열한 경쟁과 좋지 못한 재정상황 덕에 일부 교육인력들이 서명해야만 하는 [새로운] 계약을 도입했다. 거기에는 이들이 (세미나 개최 등의) 노동에 대해 자발적으로 아무 보수도 받지 않겠다고 써 있다. 이러한 계약이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이 미래 언젠가 직업을 얻을 때 (경력 상) 유용한 상징자본이 될 거라는 약속이 이 노동에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착취라고도 부를 수 없는 그러한 노동을 하면 나중에 직장을 얻게 될 거라는 약속을 매개로 이 희생은 작동한다. 왜냐 하면 사람들은 자진해서(그리고 불행히도 기뻐하며) 이를 조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디.
** 이는 다음과 같은 모형을 따른다. 곧 내가 너를 초대하면 너는 다음에 나를 초대하며, 아마도 그 사이에 너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낌으로써 나보다 좋은 장소에 나를 초대할 것이다.
이 유형론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끝맺는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희생함으로써 더 자율적이 되는 모형(이는 희생이 아니다)이나 [122] 또는 재전유를 위한 희생(이 역시 희생이 아니다)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 희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따라서 진정한 물음은 다음과 같다. 희생이 도대체 가능한가? 그런 희생이 가능하다면 거기에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진정한 상실이 수반되어야 한다. 지젝이 지적했듯 마리옹은 이 점에서 “아무런 대가없이 제공되는 순수한 행위인 선물로서의 희생이란 역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역설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이것을 일관되게 생각하려면 교환 경제 밖에서 희생을 생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역자 강조). 또는 더 명확히 말하면 더 이상 희생이 아닌 희생을 생각해야한다(역자 강조). 그러한 방식에서 선물이자 손실인 희생의 행위는 그 자체로 다시 소멸한다. 왜냐하면 어떤 교환도 없는 손실은 용어법상으로 더 이상 손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리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여자인 소유자는 사라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선물은 완전히 증여된given definitively 것으로, 곧 바친given up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증여자가 스스로 포기한 선물만이 파괴나 금욕 및 교환을 넘어선 선물이다. 마리옹에 따르면 “희생은 본래 선물을 구성하는 ‘되돌려줌’에 선물을 다시 가져다 놓음으로써, 선물을 그것의 원천인 증여-소여성으로 되돌린다Sacrifice gives the gift back to givenness, from which it comes, by returning it to the very return that originally constitutes it[내가 내어주는 선물은 본래 나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을 주어진 것, 그리하여 나의 것이 아닌 것의 지위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희생은 선물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완전히 거주한다...”** 마리옹이 보기에, 이것이 바로 본래적 희생에서 내가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고 다만 증여-소여[된 것]의 증여-소여성을 다시-내세우게 되는re-assert the very givenness of givenness 이유이다. 이것이 마리옹이 아브라함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각오만 보여주면 된다.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단지 그의 아들이 결코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뿐이다(역자 강조). 이삭은 애초에 신이 그에게 준 것이다. 이 각본에서에서 신은 “아브라함의 희생을 거절하지 않지만, 이삭의 목숨을 거두는 것을 무효화 한다. 이러한 죽음은 희생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마리옹) 만약 신이 아브라함의 제물을 받아들였다면 이것은 파괴적 희생 방식이나 교환적 희생의 방식에 적합했을 것이지만, 실제 희생/제물을 거부함으로써 “신은 두 번째로 그[이삭]를 그[아브라함]에게 다시-준다.”(마리옹, []는 Ruda) 그러므로 “희생은 선물을 재-이중화시키고 처음으로 그것을 그러한 것[이중적인 것]으로 확인한다.”(마리옹) 이러한 이해는, 무한히 자비로운 신이 제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나의 희생이 희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나는 진정으로 희생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과는 다르다. 증여자인 아브라함은 정말로 무언가를 잃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의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신의 결정]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아들이 결코 단지 그의 것만이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Žižek 2012, 52.
** Ibid.
이에 더하여, [123] 마리옹의 희생 모형model에 대해 지젝이 비판적으로 논의하면서 추가적으로 제기한, 마리옹은 언급하지 않은 두 가지 희생 방식이 있다. 이 유형들 중 첫 번째(또는 전체 계열의 네 번째)는 현재 상태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작인agency의 무력함을 보호하기 위해 행위자가 희생의 조건에 따라 행위하는 모형이다. 이 방식에서 희생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세계의 외양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사례로 지젝이 언급하는 것은 훔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훔치는 경우이다(1938년 영화 <아름다운 행동Beau Geste>에서는 삼형제 중 하나가 자비로운 고모와 함께 살면서 가족의 자랑인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이는 가족의 자랑이었다―를 훔치는데, 이 도둑질은 가족은 망가져 버렸고 목걸이는 가짜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하간 가치가 없는 것을 훔쳐 고모와 가족의 명예를 보호한 것이다). 이 희생 방식에서 다루어지는 희생 행위(자신을 희생하는 희생)는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 말하자면 사랑하는 타인을 불명예에서 구하기 위해 희생한다. 이 행위 또한 증여-소여성을 긍정하(고 재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곧 희생적 행위를 통해 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증여-소여성이 긍정되는 것이다. 행위자는 외양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희생하지만, 이 점에서 행위자는 오로지 이 외양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만 희생하는 것이다.
소여의 소여성(증여의 증여성)을 주장하는 또 다른 희생의 방식은 나의 결여를 가장함으로써 결여의 사실—지금의 경우는 타자의 결여가 아니다—을 은폐하는 것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 방식은 기본적으로, 내가 어떤 것을 원한다고 네가 믿도록 [내가] 만들 수 있는 한, 너는 내가 결여하고 있다고 내보인 것을 내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의존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타인의 생각에 우리가 얻고자 하는 어떤 것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우리는 결핍이나 상실을 가장한다. 이 방식은 희생이 교환 논리를 초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속일 뿐이며, 따라서 그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 아니라, 특정 유형의 그의 태도이며 우리가 실제로 여전히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그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6. 희생 : 앎과 진리
지금까지의 기묘한 결과를 요약해보자. 향유와 희생 중 하나를 선택할 때, 향유 역시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희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희생하려는 시도에서 우리는 희생할 수 없다는 기묘한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의 정식으로 표현해보자. 우리는 희생할 수 없으며 동시에 희생하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더라도 희생해야하지만 동시에 희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한계가, 실제적 한계가, 실제적인 교착상태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희생에 연관되어 있으며 [124] 그 관념에 구현되어 있는 아마도 대문자 실재the Real의 교착 상태일 것이다. 아마도 사유의, 개념 자체의 한계일 것이며 이는 희생 불가능성과 희생해야할 필요성 사이의 기묘한 연쇄를 통해 현상한다(역자 강조). 희생은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이에 관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언제나 그렇듯이 헤겔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정신현상학>의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앎이란 무엇인가? 헤겔은 이를 절대지라고 부른다. 절대지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앎이며, 이는 자신을 희생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주장을 어떻게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
아마도 철학 역사상 <정신현상학>만큼 오작동과 실패한 희생에 집착하는 책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전체 노력은 —처음에 나타난 확신의 희생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혁명의 결과인 타인의 희생으로, 그리고 헤겔이 칸트의 도덕성 관념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앞의 희생들을 내면화하는 데까지 이르는— 희생을 개념파악하려는 시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역자 강조). <현상학> 모든 단계의 이상한 공통점은 각 단계들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어떤 것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한 안정적인 앎을 산출하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은 안정성이라는 관념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것임을 반박할 수 없게 보여주며, 이 책이 그리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역자 강조). 우리는 모든 앎이 근본적 불안정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다른 말로 바꾸자면 그 어떤 앎이라 해도 우연성이 그 근본 토대라고 말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헤겔에게 우연성이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점을 우리가 상기해야 하지만—, 그러나 절대적인 앎이 절대적이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앎의 불안정성에 대한 통찰, 앎의 비일관성이라는 한계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근본적으로 가정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앎이 어떤 것들을 알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앎이 자신 안에 앎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함을 안다는 것을 구성적으로 함축하기 때문이다(역자 강조). 절대지는 이를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단적으로 알 수 없는 ―왜냐하면 앎의 우연성을 당연하게 가정할 수 없고 마치 이 우연성이 필연적인 것인 마냥 행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자신이 안다는 사실을 안다.
* Hegel 1977, 492.
따라서 헤겔의 절대지는 단적으로 앎에 포함되지도, 통합되지도, 앎 안에서 단언 될 수도 없는 어떤 것―왜냐하면 그러한 것을 안다는 것은 앎의 폐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을 알고 있다(역자 강조). 절대지는 앎의 한계를 알기—그리고 그 점에서 이상하게도 [125] 앎 자체를 희생하기—때문에 불가능한 앎이다(역자 강조). 그러나 이 불가능한 앎이 없으면 우리는 앎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우리는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즉 앎이 구성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앎이다(역자 강조).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알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하지만, 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앎은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앎이다. 절대지는 따라서 어떤 것 또는 절대자에 대한 객관적 앎도, 절대자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앎도 ―이것이 헤겔의 고전적 오독이다― 아니다(역자 강조). 절대지는 어떤 앎에 구성적인 어떤 것, 즉 그 [개별] 앎 자체에는 통합되지 않는 어떤 것에 [개별] 앎이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다. 내가 어떤 것을 주장할 경우 그 주장되는 어떤 것이 바로 그것 자체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면, 나는 그러한 것을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앎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절대지는 또한 불가능한 앎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모든 앎의 한계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생이 그러했듯, 필연적이면서도 불가능한 앎이 존재한다.
이로써 그것은 희생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헤겔은 [<현상학>에 이어] <논리의 학>에서 이 앎은 너무나 순수해서 “자체로 앎이기를 중단”* 한다고 말한다. 왜 그러한가? 이 앎은 앎 자체를 불완전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것인 비非-앎non-knowledge, 곧 앎의 부재와 구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지는 앎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이 앎이 여하한 것에 대해 알기 위해 필수적이라 할지라도, 절대적 앎은 직접적으로 앎이기를 중단한다.
* Hegel 1969, 69.
즉 앎의 불안정성 속에 진리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불안정성은 앎의 진리이지만 알 수 없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첫 번째 소문자 앎과 두 번째 대문자 앎1. knowledge and 2. Knowledge of an object이 될 것이다[??]). 따라서 절대지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앎이다. 절대지는 자신의 불안정성이 자신의 진리라는 것(이는 개념적으로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It knows that it does not know that it knows that its instability is its truth, which conceptually implies that truth cannot be known.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앎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절대지가 알고 있는 앎의 진리는 필수적이지만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지는 앎의 출현 자체가 지닌 불안정성과 우연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full assumption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real 앎이다. 왜냐하면 앎의 대문자 실재the Real에 대한 주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절대지가 한계에 대한 앎이며 이는 희생에 대한 앎(이 희생에 대한 앎은 그 자체로 앎의 희생이 된다)이 된다고 근본적으로 정의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126] “이 희생은 내어놓음/외화externalization이다. 이렇게 내어놓을 때 정신은 자신의 순수한 ‘자기’를 자신에 외적인 시간으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공간으로 직관하면서 자유로운 우연적 사건의 형식 속에서 자신이 정신으로 생성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정신의 이 마지막 생성인 자연은 직접적인 생동하는 정신의 생성이며, 밖에 놓인 정신인 자연은 그것의 현존재 속에서 오로지 정신의 지속적 현존의 영속적 내어줌이자 주체를 회복시키는 운동일 뿐이다.”
희생이 곧 우연적 사건을 통해 정신이 그 자신이 되는 외화/내어놓음이라면, 이것은 희생이 외화/내어놓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디우와 더불어 우리가 주관화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할 때, 정신은 그 자신으로 생성된다. 주관화는 외화/내어놓음이 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 헤겔은 이러한 외화/내어놓음의 양상을 독일어 “entlassen”, 즉 놓음release이라고 부른다. 헤겔에 관한 대부분의 문헌은 이 용어를 거의 간과한 채 지나쳤다.* entlassen은, 헤겔이 절대적 앎의 개념과 관련하여 외화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학술적으로 말해 “entlassen”은 몇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무언가를 놓아준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자녀를 세상에 ‘내보낸다’고 말할 수 있다. 2. 어떤 것에서 그것이 가진 무언가의 기능을 덜어내는 것을 의미하므로 “entlassen”은 해임, 떠나게 함 또는 직장에서 누군가를 해고하는 것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3. “entlassen”의 “Ent”가 암시하는 것은 연관된 행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lassen”은 이 행위가 (하이데거의 용어인 Gelassenheit에서와 같이) 사물을 그대로 두는 행위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기묘한 말이 외화/내어놓음에 관한 정의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 언제나 그렇듯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는 좋은 예외사례이다. Cf. Malabou 2005, 155f.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어 반복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긍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본래적 주체가 되는 일이 우연히 벌어지는 경우에만 우리는 본래적 주체가 된다는 관념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일이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에 말이다(이에 대해 바디우가 붙인 이름은 물론 “사건”이다). 그러므로 희생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관념이다. 곧 우리는 이미 주체이—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을 희생함으로써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희생해야 한다.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희생해야만 주체가 될 수 있다—이것이 바로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한계로서 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것은 유한성이나 인간의 한계 등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한하지 않은 것이 나타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역자 강조). 따라서 우리가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관념 및 이 관념과 더불어 있는 [127] 자유에 대한 관념(그리고 어쨌든 뭔가를 희생 할 수 있다는 관념)을 희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나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나에게 자유를 강제하는 어떤 일이 우연적으로 일어날 때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라는 것. 일관적 희생 관념에 본래적 양상인 entlassen은 내가 이미 주체라거나 또는 이미 잠재적 주체라는 관념을 포기함을 함축한다. 곧 나는 내 힘으로 어떤 것을 할 수 있다거나, 내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뭐라도] 일조 할 능력이 있다는 관념을 포기한다. 내가 주체됨을 준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때, 내가 죽은 것처럼 행동할 때, 종말이 이미 벌어진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 진정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뿐이다. 주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본래적 방법은 먼저 주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외화/내려놓는 entlassen 것이며 주체가 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만 —아마도— 주체가 될 수 있다. 이 가정은 필연적이지만 동시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절대지의 의미의 한 측면이다.
이것이 바로 이 관념을 받아들이면 앎이 더 이상 앎이 아니게 되는 이유이다. 나는 무엇인가를 장악하는 위력이 있어야 주체가 될 수 있지만, 나는 그 무엇도 장악하지 못함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것을 긍정하는 것은 내 존재를 완전히 외화/내려놓는entlassen 것이다. 나는 우연적으로 자유롭기를 강요받을 때 자유롭다. 그것은 자연—본래적으로 이해된, 다시 말해 순전한 우연성으로 이해된 자연—에 달려 있고, 이 우연성은 결코 필연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오히려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희생을 해방적 사유에 포함시키는 적절한 방법은 첫째, 파괴나 교환, 그리고 소여/증여된 것을 선물로 재-주장 하지 않고, 둘째, 상대방을 보호하거나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고 상대를 믿게 만드는 가장된 결핍을 통해 외양을 유지한다는 관념을 희생하는 것이다.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자유의 기회가 있다. 이미 죽었음을 받아들여야만assuming that one is already dead 언젠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따라서 희생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우울함이나 향수를 수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히 어떤 종류의 영웅주의를 수반하지만, 이는 주체가 신체를 초월하는 방식과 달리 주체를 신체에서 분리하지 않는 영웅주의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재적 차이를 다루고 있다. 나의 신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동시에 나는 나의 신체임(따라서 나는 —아직— 주체가 아님)을 긍정함으로써만, 다시 말해 즉 차이를 긍정함으로써 쾌락(향유)과 고통 속의 쾌락(어리석은 희생)을 넘어서는 것이 아마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한 결과를 허용하는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곧 완전히 희생하는 것인 나 자신을 entlassen함을 통해서만, 내가 아무것도 장악하지 못한다는 관념에 완전히 동의함으로써만, 우리는 [128] 해방의 조건을 생성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아직 해방도, 정치도 아니다—내가 주체가 아님을 받아들인다고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해방을 향한 주관적 준비상태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즉 사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잠정적인 —아마도 가장 중요한— 도덕원칙 중 하나이다. 이것은 기다릴 것이 없기 때문에, 어쨌든 내가 주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기다리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다시 말해, 내가 희생할 수 없다[무능하다]고 가정함으로써 모든 것을 희생하고 희생 행위의 관념조차도 희생함으로써만, 오로지 이러한 행위에서만 —아마도— 해방은 가능했던 것이 될 것이다will have been possible. 다시 말해, 마치 희생할 수 없는 것처럼 취급되어야 할 어떤 내면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해방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희생 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하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희생이다. 해방이 요구하는 희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희생 방식은 헤겔이 ‘entlassen’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은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라’, ‘죽은 것처럼 행동하라’를 표방할 것이다. 아마도 이 표어가 새로운 붉은 잉크로 쓰여진 첫 줄이었을 것이다will have b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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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볼드체 강조는 문장 끝에 "(역자 강조)"라고 붙은 경우를 제외하면 저자인 프랑크 루다Frank Ruda 또는 루다가 인용한 원래 글의 것이다. 반대로 루다가 직접 "[]"를 사용하여 보충한 경우 문장 끝에 따로 표시해두었지만 역자가 내용상 보충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경우 별도 표시없이 "[]"를 사용하여 문장을 보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