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에 관한 시론

헤겔의 '에덴에서 추방' 해석 (1) : 앎의 자기 학대

journal934 2024. 8. 30. 21:45

[  이 글은 2024년 9월 6일 부분 수정되었으며 "앎은 상처다" 이하 부분이 추가 되었습니다. ]

 

Marc Chagall, 1961, <천국에서 추방 당하는 아담과 이브>, 니스 성서미술관 소장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 (창 2:17)

 

  에덴동산 생명의 나무 옆 금지된 열매를 맺는 나무. 한국에서 흔히 ‘선악과 나무’로 부르지만 서양에서는 이를 주로 ‘앎의 나무’(Der Baum der Erkenntnis; tree of the knowledge)로 부른다. 사실 “정녕” 죽을 것이라는 확언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간을 동산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죽음의 형벌을 대신한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되는 인간, 우리 말 표현으로 하자면 ‘사리 분별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이 왜 죽음에 비견되는 추방령의 죄가 될까?

 

  이에 대한 기독교 내 해석이 어떠하든 헤겔에게 이 추방은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 정신사(史)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에덴에서 추방과 타락을, 인간과 세계의 직접적인 통일이 깨어지는 순간인 그리스적 윤리/인륜성(die Sittlichkeit)의 몰락에 대한 종교적 표현으로 본다.

 

  흔히 윤리/인륜성으로 번역되는 독일어 ‘Sittlichkeit’는 관습, 습속을 의미하는 die Sitte에서 파생되었다. 그것은 공동체 내에서 지켜야할 질서를 의미하되, 주체가 능동적으로 숙고하여 결단한 행위라기보다 삶의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질서이다 ― 물론 그 습득과정은 훈육이나 강제력 및 습득자 자신의 노력 등을 포함할 수 있다. 이렇듯 능동적 주체의 도덕성과 대비되는, 규범성을 갖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영어 번역자들은 윤리/인륜성을 ‘ethical life’로 번역한다. 나아가 헤겔은 고대 그리스에서 나타나는 행위자들을 ‘성격(der Chrakter)’으로 지칭한다. 행위자들이 옳다고 믿는 규범은 그들 자신에게 완전히 ‘몸에 익은’ 것으로 그들이 본디 가지고 있던 성격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행위자는 사회적 규범이면서도 자연에서 주어진(혹은 주어진 것과 다름없게 된) 자신의 성격대로 행위를 수행하는 자이다.

 

 


 

선악의 “앎”과 추방형 追放刑 

 

  헤겔은 1830년 출간한 <철학적 학문들의 백과 강요綱要>(이하 <철학백과>)의 “예비적 파악” 24절에 관한 세 번째 추가적 언급 (Enz §24 Zu.3) * <구약>의 인간의 타락  에덴에서 추방 구절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에 관한 헤겔의 입장을 몇 개의 글에 걸쳐 살필 것이다.  나아가 여기서 드러나는 그의 입장을 통해 우리는 그의 철학적 기획 전체의 목표 또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인간 스스로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의 물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에게 에덴에서의 추방, 윤리/인륜성의 몰락의 경험으로 부르는 사건은 다름 아닌 근대적 자기의식적 주체의 원초적 형태( “인격(die Person)” 또는 “첫 번째 ‘자기(das Selbst)’”)가 탄생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도대체 ‘자기의식’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밑의 논의에서 차차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선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자.

인간의 타락에 관한 신화를 더 상세히 살펴본다면 ... 정신적 삶은 직접적 상태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 자신을 자연적 삶, 더 구체적으로 동물적 삶으로부터 구별한다는 점에서 이 직접적 상태는 지양된다. ... 인간이 자연적 존재에서 벗어나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이 외부세계로부터 자기의식적 존재인 자신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Enz. §24. Zu.3.)

 

하지만 이러한 자연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능동적 주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기의식으로 넘어가는 것이 어째서 죽음에 필적하는 몰락과 추방의 경험이 되는가?

 

  앞의 ‘윤리/인륜성’ 용어 설명에서 볼 수 있듯 능동적 주체성에는 어떤 분열이 암시되어 있다. 능동적 주체는 자신의 행위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주체이다. 자율적 주체는 욕구의 이중적 구조를 갖는다. 그는 어떤 욕구나 충동의 대상을 가질 때 이에 따라 곧바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욕구를 결과적으로 실행할지 결정하는 이차적 욕구를 다시 갖는다. 곧 일단 자신에게 나타난 욕구(들)을 실제로 자신의 행위의 동기로 삼아 실행하기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이 자신 스스로 생각한 기준에 비추어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면 그는 일차적 욕구를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면 알콜 중독자인 나는 냉장고를 열어 술을 보았을 때 술을 먹고 싶은 충동(1차적 욕구)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음주 충동에 대해 술 대신 물을 먹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2차적 욕구 곧 술을 마시고 싶다는 것을 내 행동의 동기로 만들길 원하지 않음). 여기서 내가 충동 혹은 금단 증세에 못 이겨 술을 마셔버린다면, 그러고 나서 그 음주에 대해 스스로 못마땅히 여긴다면 나는 자율적이지 못하다. 나는 진정한 나의 행위라고 동의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셈이다. 역으로 음주 욕구를 참고 물을 마셨다면, 즉 이차적 욕구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면 나는 자율적 주체이다.***

 

  이러한 설명은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것이며 어떤 허점이나 난점이 있을 수 있지만, 얘기하고 싶은 핵심은 저 주체의 전체 의사결정 과정에는 ‘주체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이차적 과정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 주체는 자신이 실행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행위후보(욕구)들을 일단 자신으로부터 분리해서 대상으로 둔다. 곧 자율적 주체는 우선은 자신의 자연적 충동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힘이며, 지금 부정한 모든 것을 나중에 내가 결정하고 선택하게 되더라도, 아니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도록 하기 위해, 우선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힘이다. 헤겔은 이를 주체의 추상적 “부정적 위력(die negative Macht)”****이라고 부른다. 이 부정적 위력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하는 주체가 곧 헤겔을 포함한 독일 관념론 전통에서의 ‘자기의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론의 온전한 자기의식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긍정적 정립-설정(setzen)의 능력을 더 필요로 한다.) 곧 이전 주체는 대상의 낯선 대상성―대상은 나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다―을 부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만들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윤리/인륜성의 ‘성격’들이 지닌 자연적 직접성은, 이러한 이차적 욕구 혹은 의지가 희박하거나 혹은 일차적 욕구와 지나치게 협착되어 실질적으로 발휘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들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채로”(PhG¶463)***** 자신에게 주어진 습속이나 성향, 성격을 직접적으로 확신하며 이를 곧바로 ‘자신의 것’으로 인정한다. (물론 이를 더 세밀하게 분석한다면 그리스적 인물들도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행위한다는 점에서 자기의식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설명의 단순성을 위해 이러한 측면을 도외시한다.) 곧 자신이 이 습속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이것들을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의식하며 자신이 선택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율적 주체는 습속으로 주어진 모든 규범이나 자연적 성향을 추상―헤겔은 기본적으로 ‘추상die Abstraktion’을 모든 것을 도외시하거나 부정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하고, 이에 대해 숙고하며 자신의 것으로 선택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기의식적 주체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저 그리스 폴리스의 몰락이 왜 인간에게 형벌인지를 시사한다. 그리스 몰락 이후 인간은, 우리의 일상적 표현을 사용하자면 ‘내외함’ 없이 그저 ‘자연스레’ 받아들이던 것에 대해  거리를 두고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스 인들이 받아들인 사회의 습속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그런 만큼 그리스 인들과 사회·자연은 습속 안에서 서로 투명하게 통일되어 있었다. 거기서 인간은 세계 운행의 이치(logos)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 일부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이 이 모든 세계로부터 물러나, 스스로 생각할 여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곧 자기의식적 주체의 탄생의 순간 세계의 의미, 목적, 규범은 인간으로부터 물러나며, 인간에게 스스로의 숙고 속에서 알아내야 하는 흐릿하고 낯선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앎은 이전의 자연 및 세계와 직접적 통일 상태에 있던 인간의 “죽음”이며, 또한 세계의 이치로부터 일탈한 ‘타락’이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통일을 이루던 자연이 인간에게 등을 돌려버리는 ‘추방’이다.

 


 

앎과 저주 : 헤겔의 노동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헤겔의 입장에서 “선악을 알게 해주는 나무”에서 더 중요한 것은 “선과 악”보다 “알게”됨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인간이 얻은 앎의 능력은, 습속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어진 세계의 의미와 규범으로부터 인간이 분리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알 수 있는 힘을 자각한다는 것은 곧 이제 알아야 하는, 아직은 알지 못하는 낯선 것을 앞에 두게 되었다는 역설을 함축한다. 주어진 자연적 습속 속에서 ‘알지 못한 채’ 선악을 행하던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알”아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은 곧 추방과 함께 인간에게 내려진 노동의 저주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대립 속에서,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 내기 위해서는 고통과 노동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고생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 아담에게 이르시되,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창 3 : 16-19)

 

  에덴에서처럼 인간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열매를”(창 2:9) 내어주는 자연은 사라져 버렸다. 인간이 직접적 상태에서 벗어나 세계의 균열을 일으킨 순간, 자연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인 대립적 힘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 대립의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지양(止揚)인 죽음을 제외한다면, 노고를 통해서만 대립을 넘어 자연과 관계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노동이 아니다. 헤겔에게 관건이 되는 노동은 근본적으로 정신의 노동이다. 물론 헤겔이 물리적 노동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자연적 존재를 벗어난 인간의 노동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이제 낯설어진 대상인 자연을 알아야 하고 거기서 자신이 산출하고자 하는 것을 구상(構想)해야 한다.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집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릿속에서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과정의 끝에 얻는 결과물은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K. 맑스, <자본>, 52쪽)

 

마르크스가 이 언급에서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헤겔이 생각하는 노동의 핵심은 구상력이다. 다시 말해 자연을 이해하고 그 안에 자신의 의도를 실행하여 낯선 자연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헤겔이 <정신현상학>(이하 <현상학>) 내내 강조하는 고통과 노동이다. 이런 면에서 <현상학>은 먼저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세계 안에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함을 깨닫고, 다음으로 다양한 의식 형태들이 행하는 노동들을 검토함으로써 어떻게 노동함으로써 ‘작품의 진정한 실현’이 될지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주제는 다른 글에서 다시 다루겠다. 결국은 항상 “‘진정한’ 실현”이 문제이다.)

 

  나아가 이러한 자기의식적 주체의 앎의 대상은 (이미 앞선 서술에서도 암시되고 있지만) 단지 선악이 아니라 세계의 의미 전 범위와 관련된다. 물론 <현상학>에서 그리스적 윤리/인륜성에 관한 언급이 실천적 규범에 주로 연관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핵심은 관습을 따르는 사회에서 실천적인 것과 인식적인 것을 포괄하는 인간 정신 일반이 “자연적 직접성”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사회에서 관습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관습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단지 선악의 관념을 배우는 것을 넘어, 자연 사물에 대한 정보들 및 그들을 다루는 기술, 나아가 사물과 인간이 엮여 형성하는 세계의 의미 및 목적 모두를 배운다. 관습은 이처럼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의 미분화된 총체이다. 이와달리 자기의식적 주체의 앎은 윤리/인륜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투명하게 드러났던 세계로부터 물러난다. 이 주체는 자연 및 세계 운행의 보편적 의미도, 인간 사회를 관장하는 원리도 더 이상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이러한 인간 곧 ‘인격’은 세계라는 수수께끼 앞에 놓인 자신의 (인식적면에서든 실천적 면에서든) ‘앎의 능력’만을 알게 된다.

 


 

앎은 상처다 

 

  이상에서 보듯 헤겔은 인간 정신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관습적 앎의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고하여 앎을 얻게 되면서, 세계 및 자연과 인간이 분열하며 서로 낯선 것으로 대립하게 된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앎의 원죄이며 이로 인해 인간은 추방당한다. 그런데 스스로 사고한다는 것은 검토되지 않고 주어진 세계에 대한 거리두기를 필연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사고한 결과 조화로운 세계에 대립과 분열이 일어났고 또 그 결과로 추방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거리두기를 담고 있는 앎의 행위 자체가 이미 세계와의 분열이자 대립이고 추방이다. 요컨대 사고는 자기를 추방하고, 자기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렇게 해서 사고함이란 스스로 세계와의 대립을 만들어 내고 이를 극복하는 힘겨운 정신의 노동을 떠안는다. 이에 대해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고(思考)는 스스로 상처 입힌다”(Enz, §24, Zu. 3; 역자 강조).

 

우리는 이 말을, ‘사고 자체가 자기 자신의 상처’라고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고는 세계를 알고자 하지만 사고에 필연적으로 담겨있는 ‘세계에 대해 거리두기’가 세계를 알 수 없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계속> 

 

 


 

*  1830년 출간한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철학적 학문들의 백과 강요綱要> ) 중, 1부인 논리학(Erster Teil : Die Wissenschaft der Logik)의 서론 격인 예비적 파악(Vorbegriff) 의 24절에 관해 헤겔 자신이 추가로 구두 설명한 것(der mündliche Zusatz)에 대한 필사를 말한다. 이하 언급 및 인용된 <철학백과> 내용의 출처는 G.W.F.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 im Grundrisse: Erster Teil Die Wissenschaft der Logik, in Werke in zwanzig Bänden, Bd. 8, Suhrkamp, 1970)이며,  인용시  “(Enz §절 수)"로 표시하고, 추가 구두 설명에 대한 인용은  “(Enz §절 번호 Zu 추가 언급 번호 )” 로 표기 한다. 

 


 

**   물론 ‘오늘날 얘기하는’ 근대적 주체가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몰락 이후 곧바로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헤겔 역시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 및 세계 이해 발전(곧 정신의 발전)과 ‘서구 관점에서 본’ 인류 역사의 주요 구체적 경험들이 어떻게 상호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하 <현상학>)의 “정신”장의 과제인데, 여기서 헤겔은 고대 그리스의 몰락과 로마 제국의 탄생 시점을 자기의식의 탄생 시점으로 그리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의식의 ‘실질적인’ 역사적 첫 활동에 관한 기술은 절대 왕정 탄생기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곧 헤겔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실질적 의미에서 자기의식의 무대는 그 탄생지인 로마가 아니라 근대 프랑스 사회 이후이다. 하지만, 헤겔은 이미 자기의식의 가장 원초적 형태가 고대 로마법에서 ‘인격’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참고로 <현상학>의 구성을 보면 7장 “정신”의 첫 번째 하위 장인 “참된 정신: 인륜성”의 1절과 2절은 고대 그리스를 다루고, 3절 “법적 상태”에서는 그리스 몰락과 더불어 나타난 로마제국에서의 개인과 사회의 관계 원리와 그 혼란상을 다룬다. 그 후 같은 장의 두 번째 하위 장인 “자기소외된 정신: 도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는 곧바로 근대 프랑스 상황을 다룬다.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천년에 달하는 기독교 지배의 시기는 “정신”장에서 아예 빠져 있다. 곧 헤겔의 “정신”장 서술은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곧바로 근대 프랑스로 넘어간다. 이러한 역사의 누락은 헤겔 <현상학>의 고유한 관심이 “자기의식의 자립성의 만족”이라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현상학>에서 검토하는 인류사는 인류사 전체를 다룰 필요 없이, 자기의식으로서 인간 정신 실현에 대해 주요한 사건을 추려서 서술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중세 시기 자기의식에 대한 억압과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초월자에 대한 동경 역시 자기의식에 대해 부정적 의미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헤겔은 이를 4장의 두 번째 하위 장 “자기의식의 자유”에 등장하는 ‘불행한 의식’에 대한 서술 및 이후 곳곳에서 등장하는 이 의식에 대한 언급으로 충분하다고 본 듯하다.

이하 <현상학>에 관한 인용 출처는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g. von W. Bonsiepen &  R. Heede, in  Gammelt Werke (GW) 09, Felix Meiner Verlag, 1980. 

 

*** H.G. Frankfurt, Freedom of the Will and the Concept of a Person . In: J. Christman (ed.): The Inner Citadel. Oxford 1989, pp. 63-76 참조.


 

**** 주체와 관련하여 “부정의 위력”은 “부정성(die Negativität)”, “추상(die Abstraktion)”, “순수(rein)”, “추상적 보편(die abstrakte Allgemeinheit)”이라는 개념들과 맥락적으로 함께 사용된다. 이러한 규정들과 연관된 주체는 헤겔에게는 이제 겨우 기초적 단계에 머무는 주체이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발달해야 하는 주체이다. 다만 이 규정들은 주체에게만 고유한 규정은 아니며, 실체 혹은 즉자(das An-sich)에 대해서도 동일한 규정들이 부과되어 다른 의미를 형성한다는 것을 주의해야한다.

 

***** <정신현상학>인용은 “(PhG ¶단락 번호)로 표기한다.  Terry Pinkard가 번역 및 편집한,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Trans. & Ed. Terry Pinkard,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 The Phenomenology of Spirit, Cambridge University Press(2018)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