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지금도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해문출판사의 빨간색 표지를 단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문고로 날밤을 꼬박 샌 것이 대체 며칠이었던가. 지금껏 인류가 살아오며 말하고 전하고 쓰고 남긴 많은 것들을 읽고 또 거기에 몇 장을 보태는 사소한 삶을 살고자 한다만, 그 모든 활자들 중에서 단연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칼자국에 피범벅이 된 시체거나, 얌전히 고개를 떨군 독살시체거나, 신원을 알수 없이 얼굴이 뭉개진 시체거나, 불에 태워진 시체거나, 토막 난 시체거나, 무언가 둔탁한 것에 얻어 맞아 쓰러져 있는 시체거나, 선명한 줄의 자욱을 목에 남긴 교살시체거나 등등의 시체들 이야기이다.

나는 네크로필리아가 아니므로 좋아하는 것은 '시체들'이 아니라 시체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시체 '이야기'를 즐기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세계의 무지 많은 나라들에서 채 상상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추리소설을 읽고, 굉장히 많은 작가들이 추리소설을 잘 만들어서 억만장자가 되었다.(이를테면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처럼, 게다가 소설로만 끝나지도 않는다)    


(나를 비롯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범죄와 살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범죄와 살인의 그 기막힌 이야기들은 왜 그토록 재미있을까. 

모두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살인자들이 있다. (어쩌면 신의 뜻에 따라) 최초의 살인을 했던 카인도 있고, 동생과 공모해 어머니와 그 정부를 살해한 엘렉트라도 있으며,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를 목졸라 죽인 오델로에(혹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맥베드 부부이거나 고뇌하는 살인자 햄릿, 셰익스피어의 주요 작품에 예외없이 살인이 등장한다는 점이야말로 기억할만하다) 제 손으로 정의를 만들고자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도 있다. 살인, 그리고 범죄 그 자체라고 한다면, 인간이 땅에 발을 딛고 선 그 때부터 바로 이 순간까지 한시도 인간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정색하고 말해본다면 범죄(와 살인)은 인간 삶의 어떤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것을 극화한다.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선과 악, 죄와 벌, 사랑과 증오, 인정과 배제, 지배와 복종의 모든 것이 그 곳에서 만난다. 그러나 내가 흥미를 가지는 것은 그토록 의미있는 인간의 면면이 아니다. 이 모든 기억해야만 하는 살인자들은 추리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과 추리소설의 살인자들은 닮은 듯 하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추리소설속에 등장하는 범죄와 살인은 이전의 위대한 비극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살인자들은 어떻든지간에 영웅이 아니며, 살인의 전후 맥락, 동기보다 살인 그 자체가 더 중요해진다. 추리소설속의 살인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점증하는 범죄와 살인의 자극은 읽는 이의 불안과 공포를 높여가지만, 동시에 이야기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든다. 되돌아볼 순간을 한 순간도 허락하지 않고 끝까지 몰두해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추리소설속의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공포는, 읽는 이의 개인적인 운명과 철저히 무관한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지는 불안 혹은 공포와 이야기가 그대로 맞닿는 순간, 책장을 넘기는 행위는 고통스러운 고문으로 바뀌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차라리 카프카를 읽는 것이 훨씬 나을 정도로)



그런 점에서 추리소설이야말로 근대사회가 이전의 사회와 어떻게 다른지를 증거해주는 한 실례이다. 추리소설은 범죄와 살인에 순수하게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근본적인 삶의 불안과 공포를 억제해 줄 수 있는 시대를 증거한다. 범죄와 살인의 극적인 경험이 오지의 모험가 혹은 운명을 바꾸기 위해 떠난 영웅이거나 특별한 야심가의 것이 아니라 날마다의 일상적 삶에서 부딪치게 되는 시대에, 하루하루의 삶에서 살아남는 것이 지극히 불안한 시대에 추리소설은 근본적인 공포를 잠시 망각하고 불안에서 벗어나는 기분전환의 오락이 된다.




에드가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은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추리로 살인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최초의 추리소설로 일컬어진다. (물론, 뒤팽의 논리정연한 추론의 결과가 살인자 오랑우탄으로 귀결된다는 점은 조금 괴기스럽기는 하지만.)'도둑맞은 편지(1845) 에서 명쾌하게 드러나듯이, 오귀스트 뒤팽이야말로, 역사상 이어지는 위대한 탐정들의 시조로 손색이 없다. 뒤팽의 가장 위대한 후계자는 아마도, 셜록 홈즈일텐데, 1886년, 코난도일이 등장시킨 셜록 홈즈를 통해 추리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뒤팽과 홈즈라는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가겠지만, 초기의 추리소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수께끼 풀이였다. 범죄와 살인은 꽉 짜인 퍼즐 풀이를 위한 배경을 제공할 뿐이다. 완벽하게 분석적인 사고를 통해 조립하고 분해할 수 있는 퍼즐이야말로 추리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이다. (수수께끼의 풀이는 물론 인간의 본질이다. 따지고 보면
문명이라는 것이 인류가 인간자신과 자연의 수수께끼에 도전해 풀이해 온 역사가 아니던가.수수께끼는 그런 점에서 인간의 운명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기도 하다. 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풀이로 시작했듯이.아시다시피, 추리소설의 수수께끼는 반드시 풀리고야 만다는 점에서 다른 수수께끼, 예컨대, 카프카의 케이가 맞닥뜨리는 수수께끼와 다르다.)




추리소설은, 그야말로, 사람보다 사물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증거한다. 단서는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절차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완벽하게 재구성한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사물들이다. 오히려 사람의 이야기는 변덕스럽고, 부정확하며,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는데 장애가 될 뿐이며. 잘해봐야 사물과 같은 선상에 놓인다.(사건의 해결에 목격자의 증언은 시체가 보여주는 단서이거나 흉기가 보여주는 단서보다 나을 것이 없다.)
 
공포와 불안에 가득한 일상, 온통 불확실성에 내맡겨진 삶의 조건,  눈앞에서 확인되는 계급 간의 치열한 전쟁을 매일 치루어 내는 근대사회에서 살인과 범죄 자체의 풀이에 순수하게 집중하는 것은  근대의 어쩔 수 없는 혼란과 무질서를 구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소설은 오직 근대 이후에 가능한 이야기이며 근대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는 탐침이 된다. 

어찌되었든 간에 훌륭한 추리소설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그래서 아마도 나는 여전히 밤을 새는 날들이 많을 것이다. 다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생각나는대로 발견한 사람과 사회에 대한 짤막한 단상들을 두서없이 이곳에 적어가기도 할 텐데 (게으름을 어떻게 이기고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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