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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학문을 넘어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철학계의 스타 중 하나인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철학자로서의 지젝의 관심사는 오늘날 철학의 전문영역으로 여겨지는 부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거의 전 방위로 뻗어 있으며, 심지어 영화나 tv 드라마 혹은 농담까지도 그의 사유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런 식의 폭넓은 관심, 혹은 분과학문 체계를 넘어서는 것 자체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제임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중요한 것은 분과학문 체계에 갇히지 않고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폭넓은 관심 분야는 이러한 그의 태도의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지젝이 오늘날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로는 무엇보다 논증 내지 논변(이른바 argument)을 사례로 대신하는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글을 전개해 나간다기보다는 엮어나간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한데, 그것은 많은 곳에서 그가 일반적으로 철학의 전형적 글쓰기 방식으로 인식되는 논증을 거의 무차별적인 사례의 연속적 제시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서 제시되는 무차별적 사례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으면서 어려운 철학적 논의를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막상 그의 글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생각보다 그의 글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사실 그의 글은 아주 어렵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의 글이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이나 세세한 논증을 생략하고 이를 사례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그의 글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례는 그 밑에 깔려 있는 논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한다. 독자들은 이 사례들을 통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기저의 논리를 다시 재구성해내야 한다. 그의 사례들이 재밌긴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건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이는 그 기저의 논리를 정확히 파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 그의 글은 많은 전문적 논의들을 전제하고 있다. 예컨대 (정신분석 및 맑스주의와 함께) 그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원천으로 꼽히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그의 논의에는 앨리슨(Henry Allison)이나 롱그니스(Beatrice Longuenesse), 혹은 피핀(Robert Pippin)과 같은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일급 학자들의 해석,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나오게 된 수용사적 맥락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 논의들을 잘 알지 못하면,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주장은 사실상 이해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의 글에서 전문적이고 이론적인 논의가 사실상 생략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논의는 표면적인 글쓰기 과정에서 숨겨져 있을 뿐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한자한자 의미를 따져가는 전문가들의 전문적 논의가 쓸데없는 짓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글과 보다 본격적인 다른 철학적 저서들, 예컨대 칸트나 하이데거의 책들의 차이는 현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며, 그의 논의 역시 본격적 철학적 논의의 한 형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그의 본격적인 철학적 저서들은 점점 이러한 전통적인 책들의 형태와 유사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들은 과거의 글들에 비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왜 하필이면 논증보다 사례를 중시하는 이와 같은 글쓰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겠다는 것 이상의 욕망이 깔려 있다. 내가 보기에 그가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그가 그들과 다른 욕망, 즉 흔히 말하는 철학적 논의 이상의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아카데미의 다른 많은 철학자들과는 달리 철학적 논증과 정당화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적 논의가 철학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유한 영역, 철학을 철학이게 하는 정상적인 규범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사회의 다른 부분들이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진정한 사유에 대한 욕구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이는 현실과의 만남 속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들뢰즈의 반()철학적 태도를 반대하며 철학을 옹호하는 바디우를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 b), 8-10 참조.)

그리고 논증을 사례 제시로 대체하는 그의 글쓰기 방식은 여러 철학적 논의들을 현실과 매개하여 전개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전략적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사례는 고도로 추상적이어서 현실과의 접점 없이 진행되기 쉬운 철학적 논의를 현실과 관련시켜 전개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는 사례를 연속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철학적 논의가 이미 현실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지젝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글쓰기를 채택하게 만든 그의 욕망이다. 그것은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의 독자적이고 완성된 영역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아카데미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 철학은 철학을 넘어설 때에만 진정한 철학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지젝의 글쓰기에 깔려 있는 그의 욕망인 것이다.

Posted by vinov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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