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녹두출판사의 [세철]를 기억하는지? 또, 콘스탄티노프라는 이름을 기억하는지?

한때 옛 소련에서 나온 철학교과서들이 유행하던 시기, 자주 듣던 이야기 중에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에 이 말은 역사의 합법칙적 필연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었는데, 말하자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굴러가게 돼 있으며, 이와 같은 역사의 객관적 필연성을 이해할 때 인간은 자유로와진다, 정도의 뜻으로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했다. 즉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역사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역사의 법칙은 굴레나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어릴 때 소설책에서 본 후 나에게 인상깊게 남아있었던, "운명은 순응하는 자는 데리고 가고, 거스르는 자는 끌고 간다"라는 세네카의 말과 비슷한 울림으로 이해했다.)

(* 여기서 쓰인 "객관성"의 의미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으로는,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믿음의 객관성" 부분(국역본 69-73)을 참고할 것.)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난 후, 옛 소련 교과서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당시에 이 말을 쓰던 사람들이 암암리에, 혹은 명시적으로 상정했던 필연적 역사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사회주의의 "필연적" 도래였다), 사실 이와 같은 역사관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역사관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국민적 개그맨에 가까운 인물이 된, 한때는 민주투사였던 전직 대통령은 한참 민주화투쟁을 할 당시 “달게(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기독교인들은 흔히, 지금은 이단들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언젠가는 복음의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좌빨"들은, 민주화된 세상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며, 지금은 그러한 세상이 오기 위해 잠시 진통을 겪고 있는 반동의 시기일 뿐이라 생각하고, 이른바 "수구꼴통"들은 아무리 많은 촛불들이 세상을 어지럽게 해도, 언젠가는 법질서가 실현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87년 당시의 YS. 나는 그의 민주화투쟁을 기억하고 있으며, 특히 5공 당시의 23일간의 단식을 기억하고 있기에, 나는 지금의 그가 조금은 안타깝다. 신문 사회면에 1단짜리 단신으로 소개되던 단식 당시의 그에 대한 호칭은 '어느 재야인사'였다.


이 서사들은 모두, 과정에 무슨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도달하게 되는 역사의 목적지는 애초부터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다(구체적인 목적지는 다들 다르겠지만). 그게 역사이고, 그게 정의이고, 그게 섭리이고, 그게 필연인 것이다. 이와 같은 통속적 역사관들은 공산주의의 도래가 강철같은 역사의 법칙이라 확신했던 스탈린주의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관들은 그들이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설정한 역사적 서사 자체가 개인이나 집단의 신념에 불과한 것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증명해야 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논점 선취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에 빠져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 역사관은 역사의 필연적 흐름이란 것이 따로 있어서, 이는 인간의 실천적 노력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즉 섭리와 같은 것이 미리 있어서,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든, 또 어떤 노력을 하든 달라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2.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자유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은 엥겔스가 <반뒤링론>에서 한 말이다. 이는 이후 정통 맑스주의자들에게 계승되어 스탈린주의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격상된다. (정통 맑스주의란 옛 소련과 동구권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주의의 공식적 이념으로서의 맑스-레닌주의를 말한다. 이는 흔히 루카치나 알뛰세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 맑스주의와 대비된다.)

스탈린주의는 엥겔스의 생각으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는다. 하지만 정통 맑스주의 내지 스탈린주의의 많은 것이 사실 맑스 자신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엥겔스의 생각 역시 맑스 자신과는 다른 부분이 많이 있으며, 특히 <반뒤링론>이나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언>에 나타나는 엥겔스의 철학적 사유는 통속화된 것이 많아 맑스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많이 있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이해, 넓게 말해 필연성에 대한 이해는 흔히 그 뿌리를 헤겔에 두고 있다고 생각되어져 왔다. 그래서 서구에서 60년대 이후 스탈린주의에 대한 투쟁이 벌어졌을 때, 그들이 설정한 목표는 “반헤겔주의”였다. 즉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뿌리가 헤겔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헤겔을 처단하면 스탈린주의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리면, 헤겔은 스탈린주의의 암호명code name이었다.

이와 같은 통념은 국내에도 널리 퍼져있으며, 특히 프랑스철학이 유행하면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예컨대 대중적 철학교양서로 잘 알려져 있는 <철학과 굴뚝청소부> 같은 책 역시 헤겔에 대한 이와 같은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책은 헤겔에 대해 적대적인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어서, 그것이 세계에 현현하게 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념이 진실은 아니다("Das Bekannte ist nicht das Erkannte"). 이와 같은 역사관, 이런 식의 주장은 헤겔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사실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관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이가 헤겔이다. (최소한 헤겔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인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그 어디에도 이런 식의 서술은 없다.) 이 글은 헤겔의 필연성 개념을 통해 이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투 비 컨티뉴드, 慾知後事如何, 且聽下回分解.ㅋㅋ)

 

Posted by vinoveri
,